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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번역

[번역]일본의 철도 역사

Intersection 2015.11.04 14:16

본 글은 일본어 위키피디아 일본의 철도사(日本の鉄道史) 항목을 개인적인 용도로 정리, 번역한 것입니다. 문맥을 위해 생략, 수정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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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철도사란, 일본 철도의 전개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 초창기

1.1 일본인과 철도의 만남

1825년, 증기기관[각주:1]을 이용하는 철도가 처음으로 영국에서 실용화되었다. 이 기술은 약 30년 후, 막부 말기(1853년)의 일본에 증기차의 모형으로 들어오게 된다.


1.1.1 영국에서의 철도 발전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철도는, 영국의 탄광에서 산출되는 석탄을 운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톡턴(Stockton)과 달링턴(Darlington) 간 약 40km에 설치, 운영된 스톡턴-앤드-달링턴 철도(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다. 기관차는 조지 스티븐슨[각주:2]이 설계한 로코모션 호가 이용되었다. 이 철도는 석탄 운송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여객의 의뢰가 있을 경우에는 기관차가 아닌 말과 연결하여 여객 수송을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각주:3].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 채용된 궤간 4피트 8인치가, 국제표준궤간 4피트 8인치와 1/2(1,435mm)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1830년에 영국에서 개통된 리버풀-앤드-맨체스터 철도(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는 증기기관차 로켓호를 사용하여 본격적으로 승객과 화물을 둘 다 수송할 수 있었다. 그 후 철도는 각 선진국에서 산업 발전을 담당하는 역할로 발달해 나간다.




<런던 과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로켓 호>


1.1.2 모형 철도와의 만남

일본에서 처음으로 달렸던 철도는, 함선에 실어져서 운반된 모형이였다. 막부 말기 가에이 6년(1853년) 7월, 러시아의 예프피미 바실리예비치 푸탸틴(Евфи́мий Васи́льевич Путя́тин)[각주:4]이 이끄는 4척의 군함이 나가사키에 입항하여 에도 막부와 개국의 교섭을 하였다. 약 반년에 이르는 체제기간 중에 러시아 측은 몇 명의 일본인을 배 위로 초대해서 증기차의 모형 운전을 보여주었다. 초대된 자들은 증기기관차의 모형을 보고 이후에 각 영지로 돌아가서 영주에게 보고하였다.

1854년 나가사키에 이어서 요코하마에서도 모형 증기기관차가 질주하였다. 이것은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각주:5]가 두 번째의 일본 방문에 즈음해 대통령이 쇼군에게 헌상품으로 주라고 보내 준 물건이였다. 모형이라고 해도 기관차에는 기관사가 타서 운전했고, 객차는 6살 아이 정도면 안에 탈 수 있을 정도로 큰 물건이였다. 이것을 본 카와다 데키사이(河田迪斎)는「객차의 지붕에 걸쳐서 타면 되지 않느냐」 하며 협상한 후에, 승차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 땅에서 객차에 「탔다」라고 할 수 있는 첫 사례이다. 또한, 이 모형은 에가와 타로자에몬(江川太郎左衛門)[각주:6]도 구경해서, 몸소 운전하고 싶다고 간청하였고 운전에 성공하였다.

나가사키에서 전시된 지 2년 뒤 안세이 2년(1855년) 2월, 사가 번의 다나카 히사시게(田中久重)[각주:7]가 증기기관차의 모형을 완성시켰다.



HP | HP psc1300


<다나카 히사시게가 제작한 증기기관차 모형.>



1.2 철도개통

1.2.1 관영철도건설의 결단

메이지 유신 다음 해, 정부는 관영[각주:8]에 의한 철도 건설을 결정하고 신바시(新橋) - 요코하마(横浜) 간의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교토에서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포고되고 보름 후인 게이오 3년 12월 23일(1868년 1월 17일). 막부의 외국사무총재 오가사와라 나가미치(小笠原長行)의 명에 의해 미국 영사관 서기관 앤턴 포트만(Anton L. C. Portman) 앞으로 에도 - 요코하마 간의 철도건설면허가 부여되었다. 이 면허는 미국이 경영권을 가지는 「외국관할방식」이라고 부르는 것이였다. 하지만 연호가 메이지로 바뀐 후 미국 측은 이 면허를 근거로 건설 요청을 하였으나, 메이지 정부는「이 서명에 적혀 있는 막부측의 서명은, 교토의 신 정부 발족 후의 것이라 외교적 권한은 없다.」라는 뜻으로 거부하였다. 그 후 신 정부 내부에서 철도 건설에 관해 검토가 진행되고 메이지 2년(1869년) 11월 「자국관할방식」에 의해 신바시와 요코하마 사이의 철도 건설을 결정하였다. 당시 일본 스스로 철도 건설은 무리였기에, 기술이나 자금을 원조해 줄 나라로 영국을 선정했는데 이것은 철도의 발상국인 영국의 기술력을 평가한 것과 일본의 철도에 대해 건설적인 제안을 했던 주일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 경(Sir Harry Smith Parkes)의 존재도 컸다. 다음 해인 메이지 3년(1870년), 영국에서 에드몬드 모렐(Edmund Morel)[각주:9]이 건축사장으로 착임하여 본격적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편 일본측에서는 메이지 4년(1871년)에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각주:10]가 광산장관과 철도장관에 취임하여 건설에 종사하였다.

일본의 철도는 메이지 5년(1872년) 9월 12일(음력. 양력으로는 10월 14일)에 신바시역~요코하마역 간 정식으로 개업하였다[각주:11]

이후 철도는 많은 평판을 받으며 개업 다음 해에는 큰 폭의 흑자를 기록하였으나 운임 수입의 대부분이 여객 수입이였다는 점이 있다.


1.2.2 최초의 노선

철도의 수송력을 결정하는 궤간은 국제표준궤(1,435mm) 보다 좁은 협궤인 1,067mm으로 선정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일본의 상황을 생각하면 타당한 선택이였다. 궤간이 넓은 쪽이 큰 열차를 빠르게 달리게 할 수 있었지만 건설비가 늘어나고 커브를 크게 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이때문에 당시 가난한 나라였고 산이 많은 일본에서는 표준궤는 사치치였던 것이다. 당시의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나 뉴질랜드도 1,067mm을 채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와 같은 궤간이라고 「영국은 일본을 식민지처럼 격하했고, 1,067mm을 도입시켰다.」등의 설이 있지만, 옳지 않다.


그 외의 기술적 포인트를 열기하면

- 실제 건설에서는 토목공사는 축성 경험이 있는 일본의 기술이 활용되었으나 현재의 타마 강에 제작된 로쿠고우가와 교량(六郷川橋梁) 만큼은 영국인의 지도 아래 가교되었다.(메이지 10년 철교로 교체)

- 차량은 전부 영국에서 수입. 증기기관차 10량은 모두 축배치 1B 탱크기관차로 5개 회사의 제품을 섞어서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 4량이였던 샤프 스튜어트(Sharp Stewart) 사 제작의 기관차가 제일 쓰기 편했다고 전해진다.

- 객차는 전부 2축으로 상등차(정원 18명) 10량, 중등차(정원 26명) 40량, 완급차 8량이 수입되었다가 개업 전에 중등차 26량은 정원 52명의 하등차로 개조되었다. 당시의 객차는 대차나 프레임이 철제였지만 벽이나 지붕을 포함한 차체는 목조였기에 개조는 숙련된 일본인 목공에 의해 실시되엇다.

- 기관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는 외국인이였다. 게다가 운행 다이어 작성도 영국인인 W・F・페이지에게 일임되었다. 이들 외국인 기술자는 오야토이가이고쿠진(お雇い外国人) 이라고 불리며 높은 급료를 받았다.


1.2.3 영업성적

개업 다음해인 1873년의 영업 상황은, 승객이 1일 평균 4347명 / 연간 여객 수입 42만엔 / 연간 화물 수입 2만엔의 수입을 올렸고 직접 경비 23만엔을 제하면 21만엔의 흑자를 올렸다. 이 결과는 「철도는 돈이 된다.」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객과 화물 비율에는 꽤나 큰 불균형이 있었는데 이는 철도측의 화물 운용 준비의 부족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 직후는 근대 산업이 미발달 된 시기라서 「수송할 물자가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1.2.4 한신[각주:12]간의 노선

게이힌(京浜)[각주:13] 간과 같은 시기에 이한신(京阪神)[각주:14] 지역도 순조롭게 건설이 진행되고 있엇고 그 경과로 메이지 7년(1874년) 5월 11일에 오사카역(大阪駅) ~ 고베역(神戸駅) 사이가 개통되었다.그러나 이 때는 임시 개업으로 취급되고 있어서 메이지 10년(1877년), 교토역(京都駅)까지 연장되던 때에 개업식이 이루어졌다.

한신 간 철도의 특징은 큰 강을 몇 번이나 횡단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시야 강이나 아시야 강은 강바닥이 주변의 평지보다 높아서 이를 건너기 위해 강 아래에 터널을 뚫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 최초의 철도 터널은 이시야 터널로, 전문 기술을 가진 외국인의 지도에 의해 벽돌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 외에 아시야 터널은 일본 최초의 복선 규격의 터널로 뚫렸다. 그리고 무코 강, 칸자키 강, 요도 강은 영국인 잉글랜드가 설계해 영국에서 제작된 트랜스 교가 가설되었다. 

메이지 9년(1876년)에는 교토역(당초에는 오미야역의 임시정거장)에서 오사카역 사이가 개통되어 게이한신 지역이 철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시야 터널. 터널 위로 강이 지나간다.>


1.2.5 홋카이도의 철도

홋카이도 최초의 철도로 알려진 관영 호로나이 철도가 메이지 13년(1880년), 미국인 기술자의 지도에 의해 테미아역(手宮駅,이후에 폐지) ~ 삿포로역(札幌駅) 간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이후에 테미야선과 하코다테 본선이 된다. 이 때 수입되었던 축배치 1C의 미국제 텐더 기관차(7100형, 벤케이나 시즈 등의 애칭이 붙여짐)가 몇 량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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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0형>


1.3 대사철건설의 시대

순조롭게 시작한 철도지만 메이지 10년(1877년)의 세이난 전쟁[각주:15]후의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신규 건설은 도카이도선(메이지 22년 전 구간 개통)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중지되었다. 철도 장관인 이노우에 마사루 등은 철도의 국유화를 주장하였으나, 이때까지 개통되었던 철도는 신바시역~요코하마역 간 외에 홋카이도의 호로나이 철도나 카마이시 철도, 그리고 오츠카역~고베역 간에 머물렀었다. 이것으로는 철도를 정비하는 것이 지지부진해질 것이 예상되었기에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각주:16]나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각주:17]를 중심으로 사유 자본을 이용해 철도 건설을 바라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결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 반영반민의 회사로 메이지 14년(1881년)에 니혼철도(日本鉄道)가 설립되었다. 니혼철도의 영업성적은 정부의 보호를 받는 것도 있어 양호했기에 그 후 비슷한 방식으로 간선의 정비를 실시하는 사철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이후에 니혼철도를 포함해 홋카이도탄광철도, 간사이철도, 산요철도, 큐슈철도를 합한 것이 메이지 시대의 「5대 사철」이라 부른다.) 

각 사철에 대응하는 지원의 정도는 건설하는 지역 사정에 따라서 큰 폭으로 차이가 났는데 이는 원조를 하는 정부의 판단이 신중하게 결정되었다고 추측된다.


메이지 18년(1885년)에는 간사이 경제계의 중진인 후지타 덴자부로(藤田伝三郎)[각주:18]와 마츠모토 쥬타로(松本重太郎) 등을 발기인으로 설립되었던 한와철도(阪堺鉄道)가 난바역(難波駅) - 야마토가와역(大和川駅, 이후에 폐지)간을 개업하였다. 이는 이후에 난카이철도(南海鉄道)[각주:19]의 난카이 본선의 일부가 되었고 이 회사는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사철[각주:20]로 존재하고 있다.

사철 건설의 움직임은 메이지 23년(1890년)에 들어 일단 진정되었지만 그 이후 중규모에서 소규모의 노선을 운영하는 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는데 이 흐름은 메이지 39년(1906년)의 철도국유법 공포 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관영철도(국철)에도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노선 정비가 진행되어 메이지 22년(1899년) 7월 1일에 현재의 도카이도 본선을 전부 개통하게 되었고 그 노선의 다수가 현재의 신에츠 본선, 오우 본선 등으로 나누어지며 위에 적힌 사철들의 보조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3.1 도카이도선

당초에 도쿄와 관서지방을 잇는 노선은 나카센도(中山道)[각주:21]를 경유하는 것이였다. 이유는 도카이도(東海道)[각주:22]를 지나가는 루트는 해운이 발달하였기에 운임이 비싼 철도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도카이도 루트는 바다와 가까워서 외국의 공격을 받기 쉽다고 주장하는 육군의 강한 반대가 있던 탓도 있었다. 메이지 16년(1883년)에 「나카센도철도공채증서조례」가 교부되어, 타카사키역(高崎駅) ~ 오가키역(大垣駅) 간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산악지대를 통과하기 위한 난공사 지대가 많았다. 메이지 19년(1886년), 철도국장 이노우에 마사루는 육군의 거물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설득하고,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각주:23]에 상담하여 도카이도로 루트를 변경하는 것을 결정했다. 이를 이어 도카이도선의 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1889년 7월 1일 모든 구간이 개통되었다.


1.3.2 5대사철회사

1.3.2.1 홋카이도탄광철도(北海道炭礦鉄道)

홋카이도탄광철도는 1889년 영업 부진이던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노선을 양도받는 형식으로 발족하였다. 주로 연선의 탄광에서 산출되는 석탄을 모아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다.


1.3.2.2 니혼철도(日本鉄道)

니혼철도는 도쿄부터 군마 현을 향하는 철도 노선부터 건설을 시작해 1888년 7월 28일에 첫 노선인 우에노역(上野駅) ~ 쿠마가야역(熊谷駅) 간을 개업시켰다. 그 뒤 1884년 8월 20일에 마에바시역(前橋駅)까지 연장하고 1891년 9월 1일에는 현재의 도호쿠 본선이 되는 우에노역(上野駅) ~ 오미야역(大宮駅) ~ 센다이역(仙台駅) ~ 아오모리역(青森駅) 간을 전부 개통시키는 등 단기간에 급속도로 노선을 연장시켰다. 

이 철도의 건설은 국책적 요소가 강했다. 게다가 센다이역 이북은 인구가 적은 지역이라 완성 이후에도 적자가 예상되어서 정부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다. [각주:24]

이 회사가 1885년에 개통시킨 마에바시역 ~ 아카바네역 ~ 시나가와역 루트 (이후의 타카사키선, 아카바네선, 야마노테선)는 관영철도(시나가와역 ~ 요코하마역)와 합쳐져서 당시의 주요 수출 상품이였던 면직물의 산지와 수출 항구를 잇는 노선으로 산업 발전에 공헌하였다.


1.3.2.3 산요철도(山陽鉄道)

산요철도는 고베역(神戸駅)에서 히로시마역(広島駅)을 경유해서 현재의 시모노세키역(下関駅)에 이르는 노선 (현재의 산요 본선)을 부설하였다. 

1888년에 설립되어 1894년에 히로시마까지 완성하였고 이 해의 8월에는 일청전쟁이 시작되어 중국 대륙에의 선적기지가 된 히로시마와 우지나에 일본 각지에서 군대와 물자가 운송되었다. 동년 9월에는 메이지 천황이 히로시마에 체재하였고 대본영(大本営)[각주:25]도 히로시마로 이동하여 전쟁의 지휘를 맡았다. 이들 사람이나 물자의 운송에는 관영철도인 도카이도선 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사철인 산요철도, 니혼철도의 운송력이 필요했다. 산요지역[각주:26]는 예전부터 사람이나 물자의 왕래가 많았기에 건설 후의 수지 예상도 나쁘지 않다고 판정되었다. 그로 인해 당시에는 니혼철도와 비교해 원조가 건설비 1마일에 2000엔의 보조금 교부에 그치는 등 적은 편이였다.

산요철도는 세토내해[각주:27] 항로와 경쟁이 강요되는 사정도 있어서 적극적인 경영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일본에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서비스를 만들어 냈다. 급행열차의 설정(1894년), 식당차의 영업(1899년), 입장권의 발매(1897년), 열차 보이 서비스(1898년), 침대차의 연결(1900년) 등 관영철도보다 빨랐다. 게다가 운송력을 중시하였기에 노선들은 구배[각주:28]가 히로시마 현 내의 세노하치 구간(22.5퍼밀)을 제외하고 10퍼밀 이하, 곡선 반경 300미터 이상으로 건설되었다.[각주:29] 또한 사철로서는 유일하게 자사 공장에서 기관차 23량을 제조하기도 하였다.


1.3.2.4 큐슈철도(九州鉄道)

큐슈철도는 모지코우역(門司港駅)에서 야츠시로역(八代駅), 미스미에역(三角駅), 나가사키역(長崎駅), 코쿠라역(小倉駅)에서 분기하여 유쿠하시역(行橋駅)으로 향하는 노선을 부설하였다

[각주:30] 건설 당시에는 산요철도와 동등한 원조를 받았다. 독일의 헤르만 룸슈텔(Hermann Rumschöttel)의 지도 하에 독일에서 수입된 차량을 사용해 1891년까지 모지코우역 ~ 쿠마모토역, 토스역 ~ 사가역 간을 완성하였고 치쿠호 탄전의 석탄 수송 덕분에 1899년부터 화물 수입이 여객 수입을 상회하였다. 그 후 안정된 경영 상태가 계속되었기에 1907년의 철도 국유화 당시에 찬성하였다.


1.3.2.5 간사이철도(関西鉄道)

간사이철도는 나고야역(名古屋駅)에서 옛 도카이도를 따라 쿠사츠역(草津駅)에 이르는 노선으로, 츠게역(柘植駅)에서 분기되어 키즈역(木津駅)을 경유하고 아미지마역(網島駅, 현재는 폐지), 미나토마치역(湊町駅, 이후의 JR난바역)에 이르는 노선을 부설하였다[각주:31]. 1887년에 설립되어 1899년에 아미지마역 - 신키즈역(폐역) - 아이치역(폐역) - 나고야역 간이 전부 개통되었다. 관영철도의 도카이도선과 경쟁한 탓으로 국가의 건설 보조는 나오지 않았다. 간사이철도는 관영철도와 속도나 서비스로 경쟁하여 오사카 ~ 나고야 간의 속도 경쟁에 추가하여 운임할인이나 차량등급 별로 창 아래에 색지를 붙이는 등 여러가지 아이디어로 여객을 유치했다. 이러한 조치는 이후에 철도원에 들어가게 되는 시마 야스지로(島安次郎)의 힘입은 바가 크다.


1.4 청일, 러일전쟁에서의 공헌

일본의 철도가 전쟁에서 쓰였던 것은 1878년 세이난 전쟁이 처음이였다. 당시에는 게이힌 구간과 게이한신 구간만 운전했지만, 군대의 집결이나 항구의 물자 수송에 큰 효과가 있었다. 청일전쟁[각주:32]과 러일전쟁[각주:33]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 국가의 총력을 기울인 프로젝트였고 철도도 전쟁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큰 역할을 했다.


1.4.1 청일전쟁

청일전쟁은 산요철도가 히로시마까지 노선을 연장한 다음달에 발발했다. 당시 일본 철도에서 서쪽 종점이었던 히로시마는 대륙에 제일 가까운 터미널이 되었다. 히로시마에는 전쟁 지휘를 하는 메이지 덴노와 대본영(히로시마 대본영)이 자리잡았고 근처에 있던 우지나 항구는 대륙으로 물자를 실어 보내는 항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각 지역의 부대나 군사 물자는 관영철도나 사철을 이용, 환승하여 히로시마까지 집결시켰다.


1.4.2 러일전쟁

러일전쟁의 규모는 청일전쟁보다 크고 철도에 있어서 군사물자의 수송도 대폭 상회했다. 수송된 인원은 88만 6천 명, 말 13만 8천 필, 화물 26만 2천 톤에 달했다. 전쟁 중에는 이 수송량을 달성하기 위해 일반 수송은 대폭 삭감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사철을 이용하는 것은 전쟁 수행에 매우 불편했다. 예를 들면, 하코다산 사건으로 유명한 히로사키 사단의 출정은 히로사키역(弘前駅)-후쿠시마역(福島駅)이 관영철도로, 후쿠시마(福島)에서 시나가와(品川)까지가 니혼철도, 시나가와(品川)에서 고베(神戸)까지는 다시 관영, 고베(神戸)에서 히로시마(広島)까지 산요철도를 이용하였고 히로시마에서는 배를 이용해 대륙[각주:34]으로 건너갔다. 이런 수송 형태의 실시로 인해 각 철도 회사간의 시간표나 차량의 변통, 사후의 운임정산 등 번잡한 업무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러한 점들로 인해 전후에 철도국유화로 이어진다.

 

1.5 도시교통의 시작

1882년에 도쿄에서 개업한 도쿄마차철도가 도시교통기관의 시초이다. 그러나 먹이나 분뇨의 문제가 있었기에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전기를 이용하는 궤도교통, 즉 노면전차로 바뀌게 되었다. 최초의 사례는 1895년(메이지 28년) 개업한 교토전기철도였다. 교토 남부의 후시미(伏見)에서 교토 시내까지 6.6km구간을 달린 이 노면전차는 비와코 수로(琵琶湖疏水)의 수력발전에서 얻은 전기를 이용하였다. 이 철도는 1918년에 교토 시에 인수되었고 노선은 교토시영전차(京都市電)[각주:35]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전동차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도시 간 교통에 이용하려고 하는 구상도 생긴다. 이것은 미국의 인터 어반(Interurban)[각주:36]을 모방한 것이였다. 1905년(메이지 38년) 한신전기철도(阪神電気鉄道)를 시초로, 간사이 지방과 간토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회사와 노선이 생겨났다. 이들의 다수는 현재 사철 각 노선의 모태이기도 하다. 나고야철도(名古屋鉄道)의 전신이던 나고야전기철도(名古屋電気鉄道)처럼 노면전철을 교외전철로 발전시키는 시도도 나타난다.

게다가 1904년에는 고부철도(甲武鉄道)[각주:37]가 처음으로 궤도법이 아닌 철도 법령에 준거하여 전기를 이용한 차량 운전을 시작하였다. 근교 구간에서는 증기 차량보다 전기 차량이 우위에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난카이철도(南海鉄道) 등 전쟁 이후 국유화를 면한 사철들은 메이지 말부터 전기 차량의 투입을 시작한다.

 

 

<교토전기철도에서 1911년 제작한 차량.>

 

 

2. 철도국유화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2.1 철도국유화

메이지 시대 철도국유화에는 여러가지 흐름이 있었다. 1891년과 1899년의 경제 불황 시기엔 경영 곤란에 빠진 사철 측에서 정부가 민간을 인수하는 것을 바랬으나 두 시기 모두 보류되었다. 특히 1899년의 경우는 정부가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비 확장을 하고 있었기에 재정적인 무리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철도의 가능성과 사철 이용에 따른 불편함을 통감한 군부(특히 육군)는 전쟁 후에 철도국유화를 바라고 있었다. 1906년 3월, 국회에서「철도국유법」이 가결되며 위에서 작성한 5대 사철회사를 포함하여 대형 사철 17개 사의 국유화(인수)가 결정되었다. 인수는 1906년 10월에 시작하여 1907년 10월에 완료되었다. 인수 전의 관영철도의 총 영업거리는 2459km, 매수하여 국유화 된 노선의 총 영업거리는 4806km이었다. 인수 여부의 판단은 국내 운송의 중심이 되는 노선을 우선하였다. 당시, 난카이철도는 난바(難波)에서 와카야마시(和歌山) 간, 도부철도(東武鉄道)는 키타센주(北千住)에서 쿠키(久喜) 간의 영업을 하고 있었으나 와카야마 방면에서는 인수대상인 간사이철도의 노선, 간토 북부에서는 니혼철도의 노선이 있던 탓에 국유화의 대상으로는 한 때 포함된 적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예산 문제로 인해 포함되지 않았다.

 

2.1.1 인수 이후의 추이

인수의 결과로 「국유철도」가 되었기에 이후부터 국철로 표기한다. 최초의 효과는 장거리 열차의 설정으로, 도쿄-시모노세키 간의 직통열차나 오우선(奥羽線)[각주:38] 경유의 우에노-아오모리 간 직통열차 등의 설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차량을 전국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어 각 지방의 혼잡, 한산에 따른 배차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국유화로 인해 국철의 보유 차량은 증기기관차만으로도 174형이 1118량, 객차 3067량, 화차 20884량에 달하여서 운용과 정비, 수리에 큰 곤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후 국철은 차량과 기자재의 국산화와 표준화를 진행한다.[각주:39] 국유화 덕분에 과 사철의 비율은 역전되었고 이후 철도의 역사는 국철이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국유화의 여파로 새로운 사철의 부설계획이 줄어드는 폐해를 가져오게 된다. 국유화로 많은 돈을 쓴 국가로서는 지방에 대한 철도 정비까지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기에 경편철도법을 공포하여 경편철도[각주:40]라고 불리는 간이규격의 철도 부설을 장려하게 되었다.

또한 고부철도를 국유화하여 국철도 전차운전을 시행하는 사업자가 되었고 1915년(다이쇼 4년)에는 게이힌 구간 등 도시 주변을 중심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전철화에 나서게 된다.

 

2.2 국산화

일본 최초의 철도는 차량, 레일, 철교도 외국에서 만든 것이였고 터널 굴착은 초빙된 외국인이 지시하였으며 기관차의 운전, 시간표의 작성도 외국인이 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인은 외국에서 배우면서 서서히 기술력을 쌓았고 순차적으로 국산화를 하게 된다.

-터널은 1880년에 교토와 오츠 간[각주:41]의 오우사카산 터널(664.8미터)이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굴착되었다.

-첫 일본인 기관사는 1879년에 나왔다.

-레일의 국산화는 1907년에 되었다.

-차량의 경우, 목조객차나 화차의 개조는 목공기술이 있었기에 개통 초기부터 실행되었고, 증기기관차의 제작은 근대기술의 습득 이후에 실행되었다.

1893년, 외국인 트레비식(Richard Francis Trevithick)의 설계, 지도 아래 관영철도 고베공장에서 축배치 1B1 탱크기관차 860형이 완성. 국산이라지만 주요 부품은 수입품이였다.

1903년, 이노우에 마사루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기차제조회사(汽車製造会社)에서 축배치 1B1 탱크기관차 230형이 완성.

1911년, 축배치 2B 텐더기관차 6700형이 제조되었다. 이 타입은 일본인의 설계에 의한 순 국산 기관차로서, 기차회사와 카와사키 조선소에서 합계 46량이 생산되었다. 주요 부품의 보일러나 굴뚝 등도 국산품이였다.

1911년에는 수입 기관차의 마지막이 되는 대형 급행용 기관차 60량이 수입되었다.2C 텐더기관차 8700형 12량(영국), 2C 텐더기관차 8800형 12량과 8850형 12량(독일), 2C1 텐더기관차 8900형 24량(미국) 4종류의 증기기관차였다. 8700형 이외에는 당시 최신기술이던 과열증기를 이용하였으나, 모두 다 도카이도선과 산요선에서 여객열차를 견인하였다.

 

2.2.1 국산 표준 기관차의 완성

최초의 순 국산 기관차였던 6700형(1911년)의 성공 후, 동시기에 수입되던 8800형 등의 신예 기관차를 참고로 하여 「국산 표준 기관차」라고 불리는 것에 어울리는 기관차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1913년 완성된 9600형은, 과포화 증기를 이용하는 출력 870마력, 축배치 1D의 화물용 텐더기관차이며 총계 770량이 생산되었다. 이듬해에는 여객용으로 축배치 1C 텐더기관차인 8620형이 완성되고 이것도 총 687량이 제작되었다(이후에 기재되는 기관차는, 특별히 제외하지 않는 이상 텐더기관차이다.). 화물기관차는 1923년에 대형 D50형(축배치 1D1, 출력 1280마력)이 완성되고, 주요 간선의 장대화물열차를 견인하거나 도카이도 본선의 하코네 고개를 넘는 것에 보조적인 역할로 활약했다.[각주:42] 여객용 기관차로는 1919년에 C51형(축배치2C1)이 완성되었고, 이 기관차의 [축배치2C1과 동륜직경 1750mm] 구성은 그 후에 새로 만들어지는 여객용 증기기관차에 계승된다.[각주:43] C51형은 도카이도 본선과 산요 본선의 특급 열차 견인 기관차로 이후에도 오래 사용되었다.

 

2.3 전기철도 운행의 움직임

2.3.1 도시근교노선의 전철화

증기기관차의 운전은 굴뚝에서 대량의 연기와 불똥이 발생하는 탓에, 주택이 밀집해 있는 도시 내로의 노선 연장은 반대에 부딪히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 점에서, 전동차는 그러한 환경 문제도 없고, 방향 전환이 간단하기에 단일 기관차나 짧은 객차 편성으로 운행이 용이했고 도시 근교에서 잦은 서비스 제공에 알맞았다. 메이지 말부터 다이쇼에 걸쳐, 도시 근교에 건설된 노선은 처음부터 전철화를 하고 있거나, 혹은 증기기관차로 운전하던 것을 전철화하는 경우도 다수 보였다.

 

- 1899년, 다이시전기철도(大師電気鉄道)[각주:44]의 로쿠고우바시역(六郷橋駅)[각주:45] - 카와사키다이시역(川崎大師駅) 2.5km 사이가 표준궤를 처음으로 채용한 전기철도로 개업하였다. 카와사키다이시에 있는 헤이켄지(平間寺)로 가는 참배객을 태울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 보통철도로는 1904년에 고부철도(현재의 JR히가시니혼 주오본선) 이이다마치역(飯田町駅) - 나카노역(中野駅) 구간이 증기기관차 운전에서 일부 변경된 형태로 전철화가 되었다. 대차와 전기 제품이 미국제, 목조차체는 국산이며 가선전압 직류 600V의 전동차를 사용하였다. 전철화와 동시에 자동신호기를 설치해 5분에서 10분 사이의 운전간격으로 전동차를 주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연화로 인한 쾌적성 향상과 빠른 도착, 빠른 출발로 인한 편리성 향상으로 연선 인구가 늘고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그 후 일본 각지에서는 철도부설에 의하여 교외주택의 개발과 발전이 진행된다.

- 1905년, 도시간의 전철이 동쪽과 서쪽에서 개통되었다. 간토에서는 위에서 적은 다이시전기철도의 시나가와역(品川駅) - 카나가와역(神奈川駅), 고베와 오사카 사이는 한신전기철도(阪神電気鉄道)의 우메다역(梅田駅) - 산노미야역(三宮駅)이 있었다. 한신전기철도의 노선은 일부가 도로 위를 달리는 궤도로 취급되었으나, 개통 시부터 보기 대차[각주:46]를 갖춘 고속 전동차를 이용하여 국철로부터 많은 손님을 뺏어냈다.

- 고부철도가 호평을 받으면서 원래 니혼철도의 보유 노선이던 야마노테선(山手線)도 1909년에 전차운전으로 전환하였다.[각주:47] 대형 보기 대차가 있는 기관차 하나로 운전하며 이용하는 전력은 국철 자체의 화력발전소에서 보냈다.

- 1910년에는 간사이 지방에서 두 회사가 전철 운전을 시작했다. 게이한전기철도(京阪電気鉄道)는 이름대로 교토와 오사카 사이의 텐마바시역(天満橋駅) - 산죠역(三条駅) 간 노선을 부설했다. 1914년에는 전철로는 처음으로 급행 운전을 실시했다.

또한, 미노오아리마전기철도(箕面有馬電気鉄道)[각주:48]는 우메다역(梅田駅) - 타카라즈카역(宝塚駅)・미노오역(箕面駅) 간 노선을 개업했다. 처음에는 만족할 만한 승객 수가 나오지 않아서(지렁이 전차라고 놀림받았음.) 창설자인 코바야지 이치조(小林一三)[각주:49]는 승객 유치를 위해 타카라즈카 온천에 소녀가극을 창설하고 이것이 현재의 타카라즈카 가극단이 된다.

- 1911년, 게이세이전기궤도(京成電気軌道)[각주:50]가 오시아게역(押上駅) - 이치카와역(市川駅) 간을 개업했다. 사명의 유래처럼 최종 목적지인 나리타까지 연장된 것은 1926년의 일이다.

- 1913년, 게이오전기궤도(京王電気軌道)가 사사즈카역(笹塚駅) - 쵸후역(調布駅) 간의 영업을 개시한다.

- 1914년, 오사카전기궤도(大阪電気軌道)[각주:51]의 우에혼마치역(上本町駅) - 나라역(奈良駅) 간이 개통되었다.

 

이 시기 사철의 도시 간선형 노선의 확대, 발전이 현조하게 증가하였다. 코바야시 이치조가 이끄는 한신급행전철에서는 연선 개발과 백화점 등 부업을 노선 부설과 함께 하는 등 현재 일본의 철도 경영 모델을 만들어 냈다. 또한 도부철도(東武鉄道)나 산구급행철도(参宮急行電鉄) 등 100km 이상 장거리 운전을 하던 회사, 한와전기철도(阪和電気鉄道)[각주:52]나 신케이한철도(新京阪鉄道)[각주:53] 등 현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고속 운전을 하던 회사도 나타났다. 또한 도시교통기관에도 노면전차 외에 지하철(1927년, 도쿄지하철도[각주:54]가 시초)과 트롤리 버스(1928년, 니혼무궤도전차가 시초) 등이 나타났다.

지방의 노선에도 1921년(다이쇼 10년)에 처음으로 가솔린 동차가 요시마궤도(好間軌道)[각주:55]에 도입되는 등, 근대화의 시도는 조금씩이지만 진행되고 있었다.

 

2.3.2 우스이 고개의 전철화

신에츠 본선(信越本線)[각주:56]에서 우스이 고개를 맞두고 있는 요코카와역(横川駅) - 카루이자와역(軽井沢駅)(1997년 폐선)간의 11.2km은, 67퍼밀[각주:57]의 급구배와 26개의 터널이 있어 교통상으로 험한 곳이였다.(국철의 다른 선로의 구배는 이타야 고개[각주:58]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최대 33퍼밀을 넘지 않는다.) 1893년의 개업 이래, 선로와 차량 사이에 전용 기어가 있는 아프트식 증기기관차에 의해 운행이 지속되었으나 연속되는 터널 속에서 운전의 곤란함과 증대되는 수송량에 대해서 힘이 약한 증기기관차로는 수요를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열차의 운전을 계속하면서 2년간의 공사 끝에 우스이 고개를 넘는 철도는 1912년부터 전기기관차에 의한 운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용하는 전기기관차 10000형(축배치 C, 출력 660kW)은 독일에서 수입되었고 전력은 요코카와역에서 가까운 3000kW급 화력발전소를 건설해 조달했다. 전철화 덕분에 연기로 인한 문제가 해소되고(특히 기관사), 열차 하나가 이끄는 중량은 126톤에서 230톤으로 2배가 되었으며 속력 상승에 의해 열차의 대폭적인 증편(36편/일 -> 54편/일)이 가능해졌다.

 

2.4 건주개종(建主改従)[각주:59]인가, 개주건종(改主建従)[각주:60]인가.

1907년 철도국유화 이후, 산업의 발전과 함께 화물의 운송량이 증대된 다이쇼 초기에는 화물 수입이 여객 수입을 상회했다. 당시 도카이도선은 복선화가 진행 중이였으나, 단선 구간이 일부 남아 있어서 수송력은 한계에 달했었다. 앞으로도 늘어날 수요에 대응할 근본적인 대책으로 『주요 간선을 국제표준궤로 개조한다』는 광궤개축안이 1910년에 의회에 제출되었다. 한편으로 철도의 편리성이 널리 인식된 결과, 철도 미설치 지역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노선 건설 요구가 나왔다(당시의 노선 총 길이는 약 8000km으로 현재의 절반 정도였다.). 국철은 노선망의 확충과 기존 노선의 강화 및 개선에 힘썼으나, 다이쇼 시대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노선을 만드는 것과 기존의 간선을 개선하는 것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둘 것인가에 대해 정치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2.4.1 정치에 의한 결정

새로운 노선을 건설하는 것을 우선하는 방침은 「건주개종」이라 부르고,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가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주요 간선과 대도시권의 철도 강화 및 개선을 우선하는 방침은 「개주건종」이라 불렀고 경제계, 군부, 민정당(民政党)이 주장했다((물론 민정당의 의원도 자신의 선거구에는 노선을 유치하려는 아전인철[각주:61]에 열심이였다.). 국철 측에서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각주:62]가 개궤를 강하게 주장했고, 1917년에는 철도원 공작국장인 시마 야스지로(島安次郎) 등이 중심이 되어 요코하마선(横浜線)[각주:63]에서 표준궤간으로의 전환 실험도 실시하였고 개궤를 준비했다.

그러나 1918년 정우회의 하라 타카시(原敬) 내각에서 국제표준궤로의 개축을 미루는 것이 결정되었고 그 후 국철 관계자들은 『협궤 그대로의 수송력 개선 방안』에 몰두하게 된다. 한편으로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역구에 철도를 까는 문제에 대해서는, 1925년(다이쇼 14년)에 공포된 개정 철도부설법이 거행될 때 예정선이 많이 포함되었으나 우선순위를 어떻게 할까 등이 구체적인 것이 적혀 있지 않은 탓에 이후에 국철의 로컬선 부설, 폐지 문제를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의 개궤논쟁 을 참고하시오.


2.4.2 수송력 개선의 시책

궤간을 개조하지 않고 수송력 증강의 시책으로 여러가지 방법이 실시되었다.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크고 효과가 큰 것들이 많았다. 철도 전반의 개선은 1910년부터 1920년대에 이러우졌고, 그 결과 1930년에 일본 철도의『황금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 밑으로 당시에 실행되었던 시책들을 서술한다. 


- 간선의 복선화 : 주요 간선인 도카이도 본선이 1913년, 산요 본선이 1928년에 전선 복선화. 또한 도쿄와 오사카의 근교구간에는 기존 선로와 병행하는 별선(전차선, 즉 복복선화)이 더 건설되었다.

- 가파른 구간의 개량 : 예를 들어 가파르기로는 최대 규모였던 도카이도 본선의 고텐바(御殿場) 구간[각주:64]에서 탄나 터널 경유로의 전환을 들 수 있다. 이 개선으로 인해 속도 상승과 함께 급구배용 보조기관차의 연결과 분리로 인한 일시 정차 문제도 해소되어 도카이도 본선의 수송력은 대폭으로 향상되었다.

- 궤도강화 : 레일의 중궤도화(레일을 무겁고 견고한 것으로 전환한 것)와 자갈의 쇄석화(동그란 자갈보다 각진 자갈이 선로용 자갈에 알맞다.) 등에 의하여 무거운 열차를 고속으로 주행할 수 있게 되었다.

- 링크식(나사식) 연결기[각주:65]를 자동연결기로 전환 : 1917년 7월 17일, 모든 화물열차를 운휴시키고 모든 차량의 연결기를 교환하였다(객차는 야간을 틈타서 바꿨다.). 자동연결기로 교환한 차량의 수는 기관차 약 3000량, 객차 약 6000량, 화차 약 25000량이었다. 연결과 분리가 쉬운 자동연결기로 전환한 결과, 작업이 빨라지고 안전해져 작업능률이 향상되었다.


  

(좌) 링크식 연결기의 연결 상태 / (우) 자동연결기의 연결 대기 상태.


- 객차와 화차의 에어 브레이크 설치 : 전동차는 일찍부터 압축공기를 사용한 에어 브레이크를 사용했었으나, 증기기관차에 견인되는 객차는 힘이 약한 진공 브레이크를 사용했다(화차에는 브레이크 장비가 없었고, 기관차와 차장차에서 제동했다.). 열차에 에어 브레이크 설치는 1922년 경부터 시작되었고 1930년에는 모든 객차가 에어 브레이크로 전환되었다. 제동력이 강화된 덕택에 운전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화차의 제동설비는 점진적으로 진전되고 있었으나, 설치가 되지 않은 차량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때도 존재했다.

- 자동신호기의 설치 : 그때까지는 역 간을 단위로 쓰는 폐색방식[각주:66]으로, 한 역 사이를 한 열차밖에 달리지 못했다. 자동신호기를 설치해서 폐색구간을 짧게 한다면 열차운행의 수를 늘리는 것이 가능했기에 선로를 늘리지 않고도 대폭적인 운송량 증대를 꾀할 수 있었다. 우선 1921년에 요코하마역 - 오후나역 사이를 완목식 자동신호기[각주:67]를 설치했고 1925년 이후에는 순차적으로 현재와 같은 색등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 정차장의 기능 분화 : 철도가 처음 나타난 때에는, 한 정차장이 여객 취급, 화물 취급, 열차의 편성 구성, 차량기지의 기능 전부를 담당했었다. 그러나 운송력이 증대되고 각각의 기능을 분리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사카역(大阪駅)은 여객 취급에 특화하고, 화물열차는 다른 선로(북방화물선)을 건설하여 오사카역 구내로 화물열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북방화물선에서 인입선으로 우메다화물역(梅田貨物駅)이 만들어졌고, 별선을 따라 여객차의 차량기지(미야하라 조차장)이 건설되었다. 살짝 떨어진 곳에 화물차를 편성하는 광대한 크기의 스이타 조차장(吹田操車場)이 건설되었다.

- 간선과 터널 구간의 전철화 : 1919년에 중점 국책사항으로 「석탄 자원의 확보와 하천의 수력 발전 개발」이 결정되었다. 당초 국철은 증기기관차용으로 대량의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국책에 따라 간선 및 터널 구간의 전철화를 종래 이상으로 진행하였다. 각 구간의 전철화 상황은 아래에서 설명한다.


2.4.3 국철 전철화의 진전.

1914년 도쿄역(東京駅) 개업에 맞춰서 건설된 도쿄역 - 타카시마쵸역(高島町駅)[각주:68] 간이 국철 최초의 전철화 사례다. 이 구간은 직류 1200V로 전철화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팬터그래프를 갖춘 3량 편성의 대형 전동차 50량을 도입한 것이였다. 전동차는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전장품을 사용했고 최고 속도 80km/h의 고속으로 주행이 가능했다(그 떄 까지의 전동차의 운행 속도는 겨우 50km/h 정도였다.). 처음에는 초기 고장이 많아서 일단은 증기기관차에 의한 운전으로 대행한 시기도 있었으나, 그 이후 안정적으로 달리게 되어 1930년대에 대량으로 진출하게 되는 고속전차군의 뿌리가 되었다.

그 다음으로, 1925년에 전철화 된 도카이도 본선의 도쿄역 - 코우즈역(国府津駅) 간 노선은 장거리 운행을 위해 전동차가 아닌 전기기관차를 이용했다. 전압은 1500V[각주:69]로 승압되었고 이 전압은 현재의 JR에도 계승된다. 당시 일본에는 전기기관차의 생산 실적이 거의 없던 탓에, 이 구간에는 영국, 미국, 독일, 스위스에서 수입된 기체와 히타치 제작소(日立製作所)가 개발한 기체가 채용되었다. 수입된 기관차 중 유명한 것으로 영국제 EF50형이 있었는데, 이 기체는 초기 고장이 많아서 이것을 안정적으로 쓰기 위한 노력이 전기기관차에 관한 기술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도카이도 본선의 수송력 강화의 비책으로 건설된 탄나 터널은 공사가 힘들어 완성까지 16년이 소요되었고 1934년에 복선전철화 한 장대터널을 완성하였다. 죠에츠선의 시미즈 터널(清水トンネル)은 우스이 고개를 통과하지 않고 수도권에서 니가타로 향하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건설 시작은 탄나 터널보다 늦었으나 완성은 그보다 더 빠른 1931년에 단선 전철로 터널이 개통되었다.


2.5 제 2차 세계대전 전의 황금시대

1930년대에는 국철의 노선망이 충실해져 간선 운송력 강화의 결과가 나타났고 특급열차의 증가와 속도 향상이 이루어졌다. 도시 간을 연결하는 사철에서는 국산 대형 고속전차를 투입해 증기차를 능가하는 속도로 운전을 실시하였다. 이 시대의 기관차는 화물용으로 D51형[각주:70][각주:71](축배치 1D1, 1280마력)과 급행여객용으로 C59형(축배치 2C1)이 생산되었고, 또 EF52형 등 본격적인 전기기관차의 국산화도 시작되었다. 


2.5.1 특별급행열차

특별급행열차(特別急行列車), 1912년에 도쿄와 시모노세키 간의 직통열차가 처음으로 특급열차란 이름을 사용했다. 1929년에는 이 특급열차에 애칭을 붙이게 되어 일반공모에서 도쿄 - 시모노세키 간 일등차, 이등차 특급에 「후지(富士)」, 삼등차 특급에 「사쿠라(桜)」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다음 해 1930년, 초특급(超特急)으로 불린 「츠바메(燕)」가 운행을 개시한다. 그 때 까지는 도쿄와 오사카 사이를 특급으로 11시간이 걸렸으나(표정속도 51.7km/h), 「츠바메」는 그 구간을 8시간 20분(표정속도 66.8km/h)으로 단축했다. 「츠바메」의 인기가 높아져 후에는 「부정기 츠바메」도 생겨나고 그 이후에도 도쿄와 고베간 특급 「카모메(鴎)」가 설정되는 등 특급열차의 증대가 이루어졌다. 1940년의 도카이도 본선 하행 시간표에는 상기 5개의 특급 외에도 급행열차로 나고야행(1개), 오사카행(3개), 고베행(3개), 시모노세키행(5개)가 설정되어 있었다. 이 중에 나고야행 급행을 제외한 모든 열차에는 식당차가 연결되어 있었고, 「츠바메」・「후지」・「카모메」 그리고 시모노세키행 급행열차 중 하나는 호화로운 일등전망차가 연결되어 있었다.

 

2.5.2 사철의 발전

1930년에 들어서면서 현재 대형 사철(大手私鉄)[각주:72]로 불리고 있는 철도회사의 주요 노선이 개통되었다. 현재의 사가미철도(相模鉄道)[각주:73]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 시기에 이미 전철화되었다. 사철의 노선 건설과 경영에 대해 도부철도(東武鉄道)의 네즈 카이치로(根津嘉一郎), 세이부철도(西武鉄道)의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郎), 도쿄급행전철(東京急行電鉄)의 고토 케이타(五島慶太), 한큐전철(阪急電鉄)의 코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등 개성적인 경영자가 나타났고 격전을 벌였다. 노선 부설 당시 권리 문제에는 다양한 비화가 있는데, 「피스톨 츠츠미」(츠츠미 야스지로)나 「강도 케이타」(고토 케이타) 등 뒤숭숭한 통칭으로 불린 경영자도 있었다.

승객 유치를 위해 연선의 택지 개발을 하거나 유원지 등 집객 설비를 만든 사례도 있었다. 한신전철(阪神電鉄)은 1924년에 고시엔구장(甲子園球場)을 건설했고, 1935년에는 프로야구팀 오사카 타이거스(현재의 한신 타이거스)를 설립하였다. 라이벌인 한큐전철은 이듬해 한큐군(이후에 한큐 브레이브스)을 창단해서 대항했다. 이런 방법들은 많은 회사에서 따라하게 되어 간사이권에 많은 야구단이 존재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처음으로 터미널역에 백화점을 병설하는 방식은 1920년 한큐우메다역(阪急梅田駅)이 시도했고 그 이후에 각 사철의 터미널역에 점점 백화점이 들어서게 된다.

철도국유화에 의해 인수가 종료되었던 이후에도 소규모 사철이 국유화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에 다수는 개정철도부설법에 적힌 노선에 해당한다는 것이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전시매수사철(戦時買収私鉄)[각주:74]로 국책상 필요한 산업용 노선에 해당하는 노선도 국유화 대상이 되었다. 또한 1938년 육상교통사업조정법에 의해 남아있는 사철에 대해서도 전시 체제 아래 각 지역마다 하나로 모으는 방침이 정해져 도쿄급행전철(다이도큐)[각주:75]이나 긴키닛폰철도(긴테츠)[각주:76] 등 합병에 의해 거대 회사도 출현했다.

 

2.5.3 고속전차

각 사철은 자신의 노선에 맞는 특성을 가진 전동차를 개발해 승객을 유치했다. 그때까지 전동차는 단거리 운전에만 쓰이는 것을 전제해 제조된 탓에 3문 롱시트 차량이 주요 사양이였으나, 이 시기 건설된 관광용 노선과 도시 간의 장거리 노선에 사용되는 전동차에는 2문 크로스시트 차가 충당하게 되었다.

 

- 도부철도는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닛코(日光)로 직통하는 도부닛코선(東武日光線)에 데하 10계 전차를 투입했다.

- 게이한전기철도의 바이패스 노선으로 만들어진 신케이한철도(新京阪鉄道)의 P-6형 전동차는, 교토 부의 야마사키역(山崎駅) 근처에서 국철의 초특급 「츠바메」와 경쟁하였다.

- 산구급행전철의 2200형 전동차는, 오사카에서 이세(伊勢)로 가는 장구간(137km)을 달렸다.

- 한와전기철도(현재의 JR한와선)는 거의 같은 구간을 달리는 난카이전기철도의 후발주자였으나 모요 100형 전동차 등 고속 차량을 채용해 오사카의 한와텐노지역(阪和天王寺駅)과 한와히가시와카야마역(阪和東和歌山駅) 간을 무정차로 달려서 전쟁 이전 최고 표정속도(81.6km/h)를 기록했다.

 

이 차들은 후에 명차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차량이다.

사철과 격전을 벌인 도카이도본선의 게이한신 구간에서는 국철이 유선형 차체의 52계 전차를 이용하여 사철에 대항했고 이는 현재에도 이어지는「신쾌속(新快速)[각주:77]」과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2.5.4 지하철과 노면전차

이 시기 대도시의 교통기관으로 지하철이 건설되었다. 도쿄에서는 1927년에 도쿄지하철도(東京地下鉄道)[각주:78]가 우에노와 아사쿠사 간을 이어주었고 1935년에는 신바시역(新橋駅)까지 연장하였다. 오사카에서는, 오사카시영지하철(大阪市営地下鉄)이 1933년에 우메다-신사이바시[각주:79] 간을 개업하였고, 1935년에 난바역, 1938년에는 텐노지역까지 연장되었다.

그 이후 지하철은 대도시에 필수적인 교통수단으로 발달해 나갔다. 또한 전쟁 이전에 교통수단으로 개업한 지하철 노선은 도쿄와 오사카 뿐이였지만, 교외 사철이 지하 선로를 이용해 도심부에 들어간 사례로는 1925년에 개업한 미야기전기철도(宮城電気鉄道)가 처음이였고 그 후 간사이권을 중심으로 지하 노선을 이용하는 몇 개의 노선이 개업하였다.

도시 내의 교통수단으로는 노면전차가 발달했다. 교토(1985년), 나고야(1898년), 도쿄(1903년), 오사카(1903년) 등 대도시는 물론 북쪽으로는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旭川)에서 남쪽으로는 오키나와의 나하(那覇)까지 지방중핵도시에도 노면전차가 부설되었다.[각주:80]

 

2.5.5 탄환열차

1940년 1월 16일「철도회의」에서 가결된 「도쿄・시모노세키 간 신 간선[각주:81] 증설에 관한 건」은, 도쿄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국제표준궤간의 별선(복선)을 건설하는 내용으로, 도카이도 본선과 산요 본선의 근본적인 개선을 목표로 하는 것이였다. 이 계획은 일반적으로 탄환열차라고 불린다.

노선의 경로는 현재의 도카이도 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에 해당한다. 현재의 신칸센이 국내의 인적 수송에 특화된 전동차를 사용하는 것에 반해, 탄환열차는 시모노세키에서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 인적, 물적 수송을 고려했으므로 여객 이외에도 고속화물열차의 운용을 위해 기관차 견인을 가정했다. 또한 전철화 구간은 일부만 있고 증기기관차를 쓸 예정도 있었기에 여객열차의 최대 속도는 전철화 구간에서 200km/h, 비전철구간에서 150km/h으로 예상했다.[각주:82]

이 계획의 추진에는 당시 중국 대륙에서 전선을 확대했었던 군부의 의향도 강했다고 전해진다. 동년 8월에 신탄나터널(新丹那トンネル)과 니혼자카터널(日本坂トンネル) 착공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폰 측의 열세가 명확해진 1943년에는 니혼자카터널과 신히가시야마터널(新東山トンネル)을 제외한 다른 공사는 중단되었다. 이 두 터널은 1944년에 완공되어 재래선에 사용되었고 전시 물사 수송과 전후 부흥에 공헌하게 된다. 

2.5.6 외지의 상황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이 영유하고 있던 조선, 대만, 사할린 등의 철도도 일본에 의해 건설되었다. 만주에 대해서는 러일전쟁에서 이권을 얻어 설립된 남만주철도(南満州鉄道)가 현지 개발을 진행하였고「아시아호(あじあ号)」와 같은 호화로운 열차도 운용했었다.


2.6 전쟁 중, 종전 직후의 상황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철도는 전시체재로 편성되었고 이미 위에서 서술했듯 산업용 철도의 국유화와 사철의 통합 외에도 「불요불급의 여행(不要不急の旅行)」을 억제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처음에는 만주, 중국 방면으로의 시찰, 이세 신궁(伊勢神宮)과 카시하라 신궁(橿原神宮) 등 「황국사관교육」,「무운장구기원」을 목적으로 하는 성지 참배 여행 등은 예외로 하였다. 하지만 1943년(쇼와 18년) 2월 이후에는 군수운송을 우선하기 위해 국철 여객열차의 삭감이 진행되었고 1944년에는 특급열차, 일등차, 식당차, 침대차가 폐지되었다.[각주:83]

사이판 섬 함락 이후, 철도시설에 대해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되었고 역과 차량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주행중인 열차가 함재기의 공격을 받고 사망자가 나온 경우도 있었다.[각주:84] 하지만 파괴되면 복구하기 어려운 철교에 대해선 공격을 받은 일이 없었다. 그렇다곤 하더라도 오키나와의 철도 사례처럼 지상전의 결과로 철도가 완전히 파괴된 곳도 있는 등 큰 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관계자의 대처가 빨랐던 덕분에 도쿄대공습 다음날에도 일부 국철의 전동차가 움직였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이틀 후에는 산요 본선, 사흘 후에는 히로시마 전철(広島電鉄)의 일부 구간이 영업을 재개할 정도였다. 또한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각주:85]이 있던 날에도 철도 운행은 계속되었고 국민의 사기를 돋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종전 직후 진주해온 미군이 일본의 철도는 운행 불가능 상황에 처했다고 예상해서 디젤 기관차와 화차를 필리핀을 경유하여 수입하기로 하였으나 철도가 나름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라 수입 계획을 중지한 이야기도 있다.

공습의 사례 외에, 전후에는 패전에 쇼크받은 승객의 도덕적 해이로 여러 설비와 차량이 파괴된 사례도 있으나 자재와 노동력이 부족해 복구는 지지부진했다. 전쟁이 끝나고 재향 군인을 실은 열차나 직매 열차(買い出し列車)[각주:86] 등 여객 수요는 급증한 반면 석탄이 부족해 열차 운행은 전시 중보다 줄어들었다. 급증한 여객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운행을 과도하게 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철도 사고도 잇따랐다. 그런 상황에서도 연합군에 관한 수송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당시 일본인과 인연이 없을 정도로 호화로운 시설을 갖춘 연합군 전용 열차가 전국을 운행하고 있었다.


2.6.1 사철의 통합과 국철로의 인수

1940년 2월 25일에 시행된 「육운통제령」에 의해 철도는 육상교통수단 총동원체제에 포함되어서, 다수의 사철이 지역마다 강제로 통합되었고 군수공장으로 가는 통근수단과 자재의 운반수단이 되었다.

이 결과 도쿄의 지하철은 도쿄지하철도(東京地下鉄道)와 도쿄고속철도(東京高速鉄道)가 통합되어 제도고속도교통영단(帝都高速度交通営団)[각주:87]이 되었다. 1944년 도쿄 서부에서는 현재의 도쿄급행전철 , 오다큐전철 , 게이힌급행전철, 게이오전철, 사가미철도의 노선이 하나로 합쳐져 탄생한 도쿄급행전철[각주:88]이 나타났다. 간사이 지방에서는 1943년에 한신급행철도와 게이한전기철도가 합병되어 게이한신급행철도(京阪神急行電鉄)가 되었고 1944년에는 간사이급행철도와 난카이철도가 합병되어 긴키닛폰철도(近畿日本鉄道)가 탄생했다.

또한 국책 운송에 필요한 노선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강제 인수 대상이 되었고 한와전기철도(阪和電気鉄道)[각주:89]와 주고쿠철도(中国鉄道)[각주:90] 등이 보유한 노선이 포함되었다. 토요카와철도(豊川鉄道), 호우라이지철도(鳳来寺鉄道), 산신철도(三信鉄道), 이나전기철도(伊那電気鉄道) 4사에 의해 운영되던 노선이 하나가 되어 이이다선(飯田線)이 된 것도 이 시기다.[각주:91]


2.6.2 군사 관련 운송의 강화

국가가 온 힘을 기울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수공장으로 많은 원자재가 운반되었고 무기와 식량 등이 기지와 전투지로 보내졌다. 이 대량의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국철에서 다양한 방법이 이루어졌다.

탄환열차계획에 따라 공사를 시작한 니혼자카터널(日本坂トンネル), 신히가시야마터널(新東山トンネル)은 탄환열차계획 중단 이후에도 공사가 진행되었고 도카이도 본선의 수송력 강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세키가하라 근처의 하행선도 1943년에 구배개선공사가 완료되어 20~25퍼밀의 오르막이 10퍼밀로 줄어들었다. 혼슈와 큐슈를 이어주는 칸몬터널(関門トンネル)은 1936년에 착공되었고 육군의 강한 지지를 받아 전쟁 중에도 공사가 계속되어 1942년에 1선, 1944년에 복선화가 완료되었다.

사철에서는 나고야 주변의 중소사철을 합쳐 1935년에 나고야철도(名古屋鉄道)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회사의 노선은 나고야 시내의 신나고야역과 진구마에역 사이가 분단되어 있었다. 나고야는 당시 군수공장이 집중해 있었고[각주:92] 기술자 통근의 편의를 위해 전쟁 중인 1944년에 위 구간을 연결해 개통시켰다.

국철의 여객열차는 속력 저하가 눈에 띄었다. 1943년 2월 경부터 군사화물열차를 우선하게 되어 장거리 특급과 급행열차는 순차적으로 줄어드는 동시에 화물열차의 속도에 맞게 시간표를 개정하였다. 1944년에는 특급열차가 전부 폐지되었고 1등차, 침대차, 식당차도 없어졌다. 운송량이 늘어나는 것에 대응하여 1943년에는 D51형을 웃도는 강력한 화물용 기관차 D52형이 완성되었고 대량생산되었다. 1944년부터는 대도시권의 군수공장 통근용으로 편측 4문의 63형 전동차가 생산되었다. 전쟁 말기에 만들어진 이들 차량은 「전시설계차」라고 불리며 부품의 간략화, 안전설비의 미비, 생산공정의 간단화 등 조잡하게 제조된 물건이였다.


2.7 시설의 피폐

철도의 선로나 차량은 일정 기간동안 정기적으로 정비를 하지 않으면 성능이 저하된다. 정비를 하기 위해서는「일손」,「자재」,「자금」이 필요하나 전쟁의 중반부 이후엔 남자는 군대로 소집되어 일손이 줄어들었고 자재도 부족했다. 또한 국철 수익의 대부분은 「임시군사비」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징수된 반면 배분된 자재는 화물용 기관차를 생산하는데만 쓰였다.그 결과 차량, 설비에 대해 필요한 정비를 만족할 만큼 할 수 없었다.


이후 후지 마츠타로(藤井松太郎) 총재 시대, 국철기사장 타키야마 마모루(瀧山養)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철은 전시 중 급속도의 군수 증산과 해송에 의해 전쟁 전[각주:93]보다 2~6배의 화물 수송과 2~9배의 여객 수송을 강제했지만, 여기에 필요한 자재가 확보되지 않아 차량과 설비 등을 혹사시키게 되었다. 예를 들어 차량의 보수용 강재는 전체의 7할 이하로 줄어들었으나 오히려 2할의 과적을 용인해서 궤조의 상태가 점점 나빠져 전쟁 말기에는 평년의 1할 이하의 보충밖에 할 수 없는 상태였다.


- 타키야마 마모루(당시 국철총재실심의실조사담당)「国鉄の現状と悩み真相を訴える」『世界』1954年7月

 

2.7.1 전쟁에 의한 피해

철도 시설의 혹사,보수 문제와 더불어 국철에 큰 타격을 준 것은 타키야마도 널리 알렸던 전쟁에 의한 차량과 설비 시설 그 자체의 파괴였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철도가 처음으로 피해를 받은 것은 1942년 4월 18일에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호넷에서 발진한 폭격기 B-25의 공습이였다. 국철의 기록에는 이 날 조반선(常磐線)[각주:94]의 카나마치역(金町駅)에서 신호기가 폭탄을 맞는 피해가 있었고 4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1944년 6월부터는 중국에서 날아온 B-29 폭격기에 의해 키타큐슈 지구가 폭격을 맞았고, 11월부터는 사이판 섬 기지에서 출격한 B-29 폭격기가 주요 도시로 공습을 시작하여 피해가 증가하였다. 1945년 2월 16일 이후, 민첩해진 공모 탑재기에 의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철도 관련 시설이 직접 공격받은 경우도 많아 세이칸 연락선(青函連絡船)[각주:95]이 궤멸되는 등 피해는 부분적이지만 엄청났다. 그러나 사이판 섬에서 폭격 목표지점까지는 너무 멀었기에 주간 정밀폭격에 의한 공격으로는 성과가 높지 않은 탓에 주변 지구를 폭격하여 철도망을 망치는 작전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실패율이 높아 직원이 거주하는 주택지를 소실시켜 철도망의 조업을 멈추게 하는 무차별 융단폭격으로 작전을 변경하게 된다. 



<일본을 폭격하는 B-29기>


종전 직전에는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양 시의 주변 철도망은 큰 피해를 받았다. 히로시마역의 직원 926명 중 사망 11명, 중경상 201명의 피해가 나왔다. 한편 히로시마에서는 피폭 당일부터 구난열차가 편성[각주:96]되고 다음 날 7일 우지나선(宇品線), 8일에 산요 본선의 히로시마 구간이 다시 개통되었다. 나가사키에도 피폭 직후부터 구난열차가 편상되었고 폭심지 가까이까지 진입해 피해자를 구출했고 이사하야(諫早)와 사세보(佐世保)의 군 병원으로 이송하였다. 이 날 철도시설의 다수는 폭심지에서 비교적 떨어진 덕분에 철도망의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복구된 나가사키 본선(1946년, 미국전략폭격조사단 촬영 영상에서.)>

 

이처럼 연합군의 전략폭격은 철도망을 직접 공격하는 작전이 아니라 목표를 일반 목조 주택가와 거기에 살고 있는 일반 시민 등을 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의 철도망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전후 재건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47년에 운수성 철도총국이  발표한 『국유철도의 현황』에서, 전쟁에 의한 피해는 건물이 20%, 기관차가 14%, 전동차가 26% 등으로 피해 총액이 18억 엔에 달한다고 하고 있다. 이 금액은 국철이 쇼와 19년~20년도 2년 간의 전체 수입에 상당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종전 후에 만주나 독일에서 보여졌던 소련군에 의한 약탈과 다름없는 철도 시설의 반출은 없었다.[각주:97]

1966년 2월 26일, 참의원 운수위원회에서 공명당의 아자이(浅井) 의원은 당시 일본국유철도 총재 이시다 레이스케(石田礼助)에 대해 「국철은 전쟁에서 궤멸적 타격을 받았으나, 이에 대해 충분한 복구 조치가 취해졌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아오키 케이이치(青木慶一)는 「궤멸적 타격을 받은 사실이 없다」「일본 국철의 수송력이 빈약한 현 상황에 대해 그 원인이 미군 또는 미국에 있다고 말하고 그 원죄를 미국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독일군에 의한 조직적인 수송망의 요점 공격의 대상이 된 나라들의 사례를 보여준 후 (피해는)「폴란드나 프랑스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라고 진술하였다.

 

전쟁 재해, 보수재 없음의 요인을 가중해갔고 종전 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으로 아래와 같은 상태에 있던 이유가 국철로부터 설명되었다.

 

종전 후, 국철은 전쟁 피해의 응급복구에 주력하였고 이를 달성했지만 전쟁 전 상황으로의 자산 복구는 우리나라 산업의 회복이 늦은 탓에 진척되지 않았고, 간신히 산업이 부흥했던 때에는 국철은 공공기업체로서 자금적으로 버려진 채 오늘까지 이르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하게 대체를 필요로 하는 자산이 지금도 약 한 500억 엔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탈선의 주 원인을 이루는 낡은 화차가 약 1만 5천량(전체의 50%)이 있고 파손, 휘어짐의 위험을 내포한 33만 톤의 궤조를 들 수 있다.

운전사고는 종전 후 급속도로 증가하여 한 때는 전쟁 전의 8배에 달했다가 근래 4배 정도로 감소하였다.

 

- 타키야마 마모루(당시 국철총재실심의실조사담당)「国鉄の現状と悩み真相を訴える」『世界』1954年7月

 

태평양전쟁에 의한 국철차량의 피해

항목 피해 합계

폐차

중파

소파

피해율
(%)

기관차

891 17 279 595 14

객차

2228 913 461 854 19

전동차

563 361 36 166 26

화차

9557 2190 7367 8

합계

13239 10

 

태평양전쟁에 의한 사철차량의 피해(150개 회사 합계)

 

항목

피해 합계

폐차

중파

소파

기관차

50 23 10 17

객차

54 35 8 11

전동차

2133 1556 220 357

화차

441 271 99 71

합계

2678


사철에서의 피해는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한결같이 전동차에 집중되어 있다.

해외의 구 식민지, 점령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수백만에 달했고 사철의 활동지였던 도시 지역에도 대량으로 유입됐다.  반면에 이와 같은 피해를 받았었기에 통근, 통학, 수송을 위한 수송력은 극도로 부족했었다(이 점은 국철도 같았음.). 그 후 한국전쟁 발발~미군정 종료 시점에서는 종전 직후같은 혼란은 줄어들었고 수 년 후에는 고도경제성장이 시작되어 농촌에서 대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가속되어 간다. 이 탓에 대도시의 여객 수송은 점차 어려움을 더해가게 된다.

 

 

 

3. 부흥에서 약진의 시대

3.1 전후의 혼란과 점령군에 의한 철도 관리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였고 중립국을 통해 연합국 측에 통고하였다. 이 날 이후, 육해군은 무장을 해제당했다. 철도는 군수수송의 임무를 마쳤으나 쉴 틈 없이 무장해제된 다수의 군인과 공습을 피해서 시골로 이주한 사람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는 역할이 시작되었다. 종전 직후의 대도시는 식료품 등의 물자가 극히 부족해서 사람들은 철도를 이용해 교외로 나가 물건을 사러 갔다. 그러나 전시 중에 충분한 유지, 보수가 되지 않은 시설과 차량, 사람에 의해 운전되는 열차는 평상시라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사고를 연발하여 다수의 승객을 희생시켰다.

 

- 1945년 8월 22일 히사츠선(肥薩線) 열차퇴행사고 : 다수의 재향군인이 타고 있던 열차가 증기기관차의 출력 부족으로 터널 안 오르막을 오르지 못함. 연기로 인한 질식을 두려워한 기관사가 퇴행운전 하였으나 객차에서 내려 터널 밖으로 도망치고 있던 승객을 사고에 말려들게 한 사건. 사망자 45명.

- 1945년 8월 24일 하치코선(八高線) 열차정면추돌사고 : 교외로 식료품을 사러 간 승객 다수가 타고 있던 여객열차끼리 타마가와 교랑(多摩川橋梁)에서 정면충돌하여 둘 다 강으로 추락함. 사망자 100명 이상.

- 1945년 9월 6일 주오선(中央線) 사사고역(笹子駅) 구내탈선전복사고 : 사사고역 내 열차가 통행금지구역을 돌파하여 전복. 사망자 60명.

 

그 외에 도카이도 본선 사메가이역(醒ヶ井駅) 부근을 주행 중이던 D52형 증기기관차 보일러가 돌연 폭발한 사고와 오래된 브레이크 호스가 파손되어 발생한 긴테츠 이코마터널(近鉄生駒トンネル) 노브레이크사고(사망 49명) 등의 큰 사고가 연발했다. 또한 전후에 증기기관차의 연료였던 석탄이 극도로 부족했던 탓에, 승객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던 1947년까지 번번히 열차 편수를 줄이는 일이 있었다. 그 결과 여객열차는 대혼란이였다. 당시의 사진에서 객차에 매달리거나 화차 위에 실려있는 승객이 찍혀 있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미군이 일본에 진주하여 철도 전반에 대한 점령군의 관리가 시작되었다.

점령군의 방침으로는 철도의 복원을 우선시해 새로운 차량의 제조를 억제했다. 그리하여 부족한 여객용 증기기관차를 충당하기 위해 전시 중에 대량으로 생산되고 남은 화물용 기관차를 개조하게 된다. (D51형->C61형, D52형->C62형)

 

 

<닛포리역 4번선, 직매열차[각주:98]에 탄 사람들. 카게야마 코요(影山光洋) 촬영.>

 

 

<D52형의 보일러를 사용한 C62형.>

 

3.1.1 진주군전용열차

1945년 8월에 일본으로 진주한 미군 제8군 제3철도수송사령부가 일본 철도 전반을 관리하게 되었다. 사령부는 전국 각지의 국철과 사철 역에 RTO(Railway Transportatin Office)를 설치하고, 일본 측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국철은 상태가 양호한 객차를 모아서 정비한 진주군 전용으로 지정했고 이를 이용하여 도쿄에서 전국 각지로 향하는 전용 정기열차로 달리게 하였다. 도쿄와 오사카의 전동차가 있는 구간에서는 국철, 사철의 차량 1량에서 반량을 진주군 전용으로 사용하였다. 진주군 지정차는 창 아래에 흰 띠를 그려서 일본인이 타는 차량과 구별되었다. RTO에 의한 관리는 1952년 센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발효 전까지 계속되었다.

 

3.1.2 대사철의 분할과 일본국유철도의 발족

전후 GHQ의 지시에 의해 재벌 해체가 진행되었고, 1947년에 철도분야에도 전시 중에 합병된 사철들이 분할되기 시작했다. 도쿄에서는 다이도큐(大東急)가 도쿄급행전철(東京急行電鉄), 오다큐전철(小田急電鉄), 게이힌급행전철(京浜急行電鉄), 게이오테이토전철(京王帝都電鉄)의 4개의 회사로 갈라졌다.오사카에서는 긴키닛폰철도(近畿日本鉄道)에서 난카이전기철도(南海電気鉄道)가 떨어져나갔고, 게이한신급행전철(京阪神急行電鉄)에서 게이한전기철도(京阪電気鉄道)가 분리되었다. 한편 나고야철도(名古屋鉄道)와 니시니혼철도(西日本鉄道)는 전쟁 전부터 다수의 사철이 합병된 회사라 전후에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철은 철도성(鉄道省)이 직접 관할했다가, 운수통신성(運輸通信省), 운수성(運輸省)을 거쳐서 1949년 4월 1일에 운수대신이 감독권을 가진 공공기업체「일본국유철도(日本国有鉄道)」가 된다. 이 결과, 국철의 직원에 대해서는 「국가공무원법」이 아닌「공공기업체 등 노동기본법」이 적용되었다. 이 어중간함은 「일단 기업의 형태로 되었기에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기 어렵겠지만, 정치가의 개입은 막지 않겠다」의 형태로 되어 이후에 대폭적인 적자를 만드는 화근이 된다. 동시에 국철은 행정기관직원정원법에 의해 당시 59만 8157명이던 직원을 50만 3072명으로 줄일 것을 요구받았다. 9만 5천 명에 이르는 인원정리(즉, 해고)는 곤란한 문제였고, 7월 3일 첫 번째 면직자들이 발표되고 3일 후 시모야마(下山) 총재가 조반선의 기타센쥬역과 아야세역 사이에 시체가 되어 발견된 사건(시모야마 사건)이 발생했다. 시모야마 총재의 사인에 대해서는 자살설과 타살설이 있으나 진상은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다. 7월 15일에는 미타카(三鷹) 사건[각주:99],8월 16일에는 마츠카와(松川) 사건[각주:100]이 일어났다. 어느 것이든 인위적인 범죄의 가능성이 높게 간주되었고, 이 세 사건을 합쳐 국철 3대 미스테리 사건(国鉄三大ミステリー事件)으로 불리게 된다.

 

3.2 철도의 부흥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전쟁 특수를 맞이하여 일본의 경제부흥이 시작되었다. 도카이도 본선은 1949년에 누마즈역(沼津駅)에서 하마마츠역(浜松駅), 1953년에 나고야역까지 연장하고 1956년에 모든 선로가 전철화되었다. 전망차와 특별2등차(特別2等車)[각주:101] 등의 호화로운 차량을 연결한 특급 「츠바메」・「하토」(「つばめ」・「はと」)가 운행되었고. 야간열차에 침대차가 부활하였다.

장거리를 운영하는 사철에도 우등열차가 부활하였다. 철도의 부흥은 나아가서 전쟁 이전을 뛰어넘는 수준에 도달했다. 기술적으로도 여객차의 구조가 개량되고, 근대적 전차가 개발되었으며 디젤차와 디젤기관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철화 방식에도 교류전철화가 검토되어 실용화된다.

 

3.2.1 우등열차의 부활

긴키닛폰철도가 1947년에 「메이한특급(名阪特急)」을 부활시키고, 국철은 1949년에 특급열차로 도쿄와 오사카 간을 달리는 「헤이와(へいわ)」를 부활시켰다. 「헤이와(へいわ)」는 다음 해 유서깊은 「츠바메(つばめ)」로 개명해 자매열차 「하토(はと)」와 같이 도카이도 본선 2왕복체제로 편성하였다[각주:102]. 그 외 지역에도 급행열차와 준급열차의 부활과 신규 설정이 계속된다. 도부와 오다큐 등 관광지로 향하는 사철도 특급전차를 부활시켰다.

 

3.2.2 객차의 강체화와 경량객차

메이지, 다이쇼 시기의 객차는 철제 대차 위에 목조 차체를 덮은 구조였다. 즉 차량으로서 필요한 강도는 차량의 바닥인 프레임에만 있었기에 벽과 지붕은 목조가옥과 같은 강도였다. 이 구조는 안전상으로도 탈선, 전복하는 상황에는 목조 차체가 산산이 부서지는 탓에 승객의 피해가 확대되는 문제가 있었다. 벽과 지붕도 철로 만든 객차는 1927년부터 조금씩 생산되었지만 오래된 목조객차는 전쟁 이후에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 때문에 1947년 2월 25일에 일어난 하치코선(八高線)열차탈선전복사고는 브레이크 고장이 원인인 사고였지만 둑에서 떨어진 목조객차가 산산이 부서진 결과 사망 184명이라는 대사고를 낳았다.

사태를 중시한 GHQ의 지시에 의해 목조객차의 강체화가 진행되어 1957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프레임 자체의 강도를 유지하면서 하는 강체화는 중량이 늘어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1953년부터 중량 대책으로 전차와 디젤차를 포함한 모든 여객차에 대해 외판을 강체화 할 수 있게 프레임을 경량화하는 「세미 모노 콕」구조로 바꾸고 가벼운 차체가 제조되었다. 1955년에 제조된 10계 좌석차는 대차의 경량화도 진행되어 경량객차라고 불렸다. 1958년에 등장한 20계 객차는 도쿄와 큐슈를 잇는 침대특급 「아사카제(あさかぜ)」용으로 만들어진 차량으로, 승차감 개량을 위해 대차에 공기 스프링을 채용하였고 냉난방을 완비해 쾌적성도 향상되는 동시에 소음의 원천이였던 창문을 고정시켜 정숙성도 개선했다. 20계는 운행 중에 편성의 분할, 병합을 고려하지 않은 고정편성이라 공기 조절과 식당차에 사용하는 전기 용량 대책으로 디젤 발전기가 있는 전원차를 연결했다. 이 차량은 당시의 침대차 수준을 넘은 시설을 가지고 있어「달리는 호텔」이라고 불렸으며, 차체 측면을 청색으로 칠한 것을 따와 블루 트레인(ブルートレイン)이라고 불리며 인기를 모았다.

 

 

< 20계 객차 나하네후(ナハネフ) 22 >

 

그때까지의 객차의 출입문은 주행중에도 수동으로 열고 닫을 수 있었으나, 20계에는 주행중에 출입문이 잠기는 장치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1956년에 맹인 음악가인 미야기 마치오(宮城道雄)가 카리야역(刈谷駅)을 지나고 있던 객차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을 감안한 것으로서, 객차의 안전성 항상을 도모한 것이였다. 또한 20계 이후 생산된 객차의 출입문은 전차처럼 자동화되었다(전차는 전쟁 이전부터 자동문이였음.).

 

3.2.3 고성능 전동차의 등장

전쟁 이전의 고속 전동차는 대마력의 모터를 츠리카케식(吊り掛け式)[각주:103]으로 장착한 것으로, 속도는 빠르나 소음이나 진동이 커지는 장거리 우등열차에는 부적절하다고 간주되었다. 하지만 1950년에 완성한 쇼난형(湘南型)으로 불린 80계 전동차도 츠리카케식 구조였으나,  가속성, 고속성이 우수하고 승강덱을 갖춰 쾌적성을 가졌고 브레이크를 개량해 16량 편성운전을 실현하여 전동차에 의한 장거리 운전의 정착에 공헌하였다.

그 즈음에 미국에서 새로운 전동차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이는 소형 고속모터를 가르뎅식(カルダン駆動方式)으로 설비하고 브레이크에는 모터를 발전기로 사용하는 발전 브레이크를 공기 브레이크와 일체시켜 동작하는 것이였다. 일본에서 이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전동차는 1954년에 완성한 영단지하철의 300형 전차로, 새빨간 차체에 은색 사인커브를 곁들인 흰 띠를 감아 3개의 양측 도어를 늘여놓은 참신한 차체였다. 우등열차에서는 1957년에 등장한 오다큐 SE차(3000형 전동차)가 중공축평행 가르뎅방식과 연접구조 경량차체를 채용하여 속도와 탑승감 양방으로 우수한 전차였다. 이 전차는 완성 직후 9월에 국철의 칸나미역(函南駅)과 누마즈역(沼津駅) 간을 시험주행하여 당시 협궤 최고속도인 145km/h를 기록했다. 다음 해 등장한 151계 전동차는 국철 첫 전동차 특급 「코다마(こだま)」에 사용되었고 대차에 공기 스프링을 채용, 복층 창문과 뜬바닥 구조로 소음과 진동을 잡아냈으며 전 열차 완전 냉난방으로 쾌적한 여행을 제공하였다. 이 열차는 1959년 7월에 후지에다역(藤枝駅)과 시마다역(島田駅) 간 고속운전 테스트로 최고속도 163km/h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전동차에 의한 고속운전의 가능성을 넓혀, 장래의 신칸센 운전으로 이어지는 데이터가 된다. 

 

 

< 오다큐 3000형 전동차 >

3.2.4 디젤차와 디젤기관차의 등장

당시 비전화구간의 여객차는 증기기관차가 견인하는 형태여서 매연에 대한 승객들의 불평이 점점 강해졌다. 특히 장대터널의 내의 구배구간에서는 상황에 따라 기관사가 질식으로 죽은 경우도 있었다.

그때 국철에서는 1975년까지 증기기관차를 없애고 다른 동력기관으로 바꾸는 방침(동력근대화계획)을 세웠고 이것을 「무연화(無煙化)」라고 부르게 된다. 당시 주요 간선은 순조롭게 전철화 될 예정이였고 아간선 이하 노선의 전철화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화의 수단으로 디젤차와 디젤기관차의 투입이 검토되었다. 로컬선에 쓰일 기동차는 전쟁 이전 소수가 1량운전용 가솔린차가 제조되었으나 전쟁 중에 석유 사정이 악화되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전후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감속기는 톱니바퀴를 운전사가 수동으로 바꿔야 하는 방식이였다. 이는 2량 이상을 연결하여 운전할 경우 각 객차에 운전자를 배치해 기적 등으로 신호를 하며 톱니바퀴를 변환해야 해서 불편했다. 그런 이유로 복수의 동력차를 한 운전자가 운전하는 방식(총괄제어)은, 디젤 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려 모터 동력에 의해 주행하는 전기식과, 액체 변속기[각주:104]로 감속하는 액체식이 비교, 검토되었고 비용과 정비성 면으로 우수한 액체식 디젤차를 채택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 것은 1953년부터 제조된 로컬선용 키하 45000형(キハ45000型)[각주:105]이였고, 잇따라 1956년에 닛코선의 준급행으로 키하 55계가 만들어진다. 이 이후 일본 디젤차의 구동방식은 액체식으로 정착하게 된다.

 

 

 

< 카야철도(加悦鉄道) 키하10형(키하17형과 같은 계열) >

 

디젤기관차는 전쟁 이전 독일제의 소형기관차를 도입해서 테스트만 한 정도로 실용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간선의 무연화대책으로 시초적인 성격이 강한 DD50형(1953년) 이후, DF50형이 1957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두 형식은 디젤 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그 전기로 모터를 구동하는 전기식을 채용하였다. 엔진은 국내에서 철도용 대마력엔진을 생산한 경험이 없었기에 독일의 기술협력을 받아 일본 업체에서 생산한 것을 탑재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증기기관차에 비해 압도적으로 힘이 세진 않았다. 이후 1962년부터 국산 엔진 2기를 탑재해 액체변속기를 채용한 (강력한) DD51형이 증산되어 무연화가 진행되어 간다.

 

 

 

< DF50형 >

 

3.2.5 교류전철화

철도용 모터는 회전속도와 부하의 큰 변화에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직류모터가 적당하다. 그래서 철도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전압 600V - 1500V의 직류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일반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기는 수만에서 수십만 볼트의 교류였기에 철도회사는 일정 구간마다 변전소를 설치해 전압을 내리고 직류로 변환해 사용해야 했다. 전기의 성질로서, 교류는 전압의 변화가 매우 쉬운 것, 전기를 보낼 때 전압이 높은 쪽이 큰 전력을 보낼 수 있는 것, 송전의 면에서 전력 손실은 고전압일수록 적다는 것이 있다. 즉, 가선에 고전압의 교류를 흘리고, 차상에서 전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내리는 게 가능하다면, 변전소의 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교류 전철화는 2차대전 중에 독일에서 검토되었고, 전후 프랑스에 기술이 이어져 실용화되었다. 일본의 국철에도 장래 전철방식으로 교류를 채용하는 방침이 선정되었고 1955년부터 센잔선(仙山線)[각주:106]의 기타센다이역(北仙台駅)과 사쿠나미역(作並駅)간의 실험선을 깔아 전기기관차를 이용해 실험하였다. 성공적인 실험 이후 1956년부터 시작한 호쿠리쿠 본선의 전철화는 교류 60Hz 20000V 방식으로 채용되었고 전기기관차 ED70형이 생산되었다. 이 기관차는 차내에서 전압을 내리고 정류기에서 직류로 변환, 직류모터를 구동하는 방식이였다. 이후 국철은 홋카이도, 도호쿠, 호쿠리쿠, 규슈지역을 교류로 전철화하였고 신칸센도 교류로 전철화된다.

 

3.3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황금시대

1955년 이후, 일본은 고속경제성장기에 들어섰다. 경제활동은 해를 거쳐 활발해졌고 국민의 소득도 늘어났다. 비즈니스 승객과 관광객이 늘어났고 대량의 물자가 국내를 움직이게 되었다. 철도는 늘어나는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수송력의 강화가 이어졌고, 국철과 사철은 신형차량을 차례로 투입하였다.

도카이도 본선의 전철특급 「코다마(こだま)」는 110km/h의 고속으로 도쿄와 오사카 간을 6시간 반으로 이어주었다. 「코다마」는 속도와 쾌적함으로 인기를 끌었고 객차편성의 「츠바메(つばめ)」와「하토(はと)」[각주:107]도 1960년에 전철화되어 「코다마」의 대열에 동참했다. 1958년에 도쿄 이북에서 최초의 특급열차 「하츠카리(はつかり)」가 증기기관차 견인형식 객차로 주행하기 시작했고, 1960년에 첫 디젤특급 키하 81계로 바뀌었다. 디젤특급은 다음해 개량형 키하 82계가 특급 「하쿠쵸(白鳥)」로 등장하였다. 82계는 비전철화 구간에서 인기가 있었고 시코쿠 이외 각 지역에서 특급열차로 활약하였다. 사철에서는 긴테츠가 2층 특급전차 「비스타카(ビスタカー)」를 증비하였고 오다큐나 메이테츠에서는 운전석을 지붕 위로 올려(고상식 운전대) 승객에게 전방 풍경을 제공하는 「로망스카(ロマンスカー)」나「파노라마카(パノラマカー)」를 각각 투입했다.

 

 

 

 

< 151계에서 물려받은 특급도색의 193계 특급열차(시오사이) >

 

 

< 키하82계 디젤특급 >

 

화물열차는 고속화의 요구가 강해져, EF60형과 그 개량형인 EF65형에서는 100km/h 이상의 속도로 운전이 가능해졌다. 그로 인해 특급화물열차 외에 「타카라호(たから号)」 나 「토비우오호(とびうお号)」 등 침대특급의 견인기에로도 충당되었다.

 

 

< EF65형 전기기관차 >

 

 

경제 발전에 따라 「보다 넓은 주거공간」에 대한 요구가 강해졌고 각지에서 철도회사와 지자체가 협력하여 대도시 교외에 대규모의 택지가 조성되었고(이른바 「뉴타운」) 액세스 수단으로 새로운 노선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으로는 「철도회사에 의한 프로야구구단의 운영」이 부상했다. 전쟁 이전부터 유서가 깊은 한신 타이거스(阪神タイガース)와 한큐 브레이브스(阪急ブレーブス)[각주:108]에 이어, 고쿠테츠 스왈로즈(国鉄スワローズ)[각주:109], 긴테츠 버팔로즈(近鉄バファローズ)[각주:110], 난카이 호크스(南海ホークス)[각주:111], 니시테츠 라이온즈(西鉄ライオンズ)[각주:112]가 등장하여 지역 주민과 일체화, 승객확보와 사원의 사기 고무에 한 역할을 하였다.

국철에서는 지정석을 연결한 우등열차를 늘리고, 기존의 대장과 전화에 의한 좌석지정 시스템이 한계에 달하여 1960년에 컴퓨터로 하는 좌석지정 시스템 마르스(MARS)[각주:113] 1이 도쿄지역에 도입되었다. 처음에는 하행선 1호 코다마와 2호 코다마만 가능하했다. 도카이도 신칸센의 개업 시에도 지정권은 대장에 의한 방식이여서 꽤 혼란이 있었으나 다음 해(1965년)에 신칸센도 마르스를 지원하게 된다. 1965년에 국철은 지정권을 처리하는 창구를 분리하여 녹색 창구(みどりの窓口)라고 하였다. 이후 1970년에 좌석지정업무는 전부 컴퓨터화되어 대장작업은 사라지게 된다.

 

3.4 늘어나는 수송력의 강화

경제의 급성장에 따라 주요 간선의 수송력은 포화되었다. 국철은 주요 간선의 복선 전철화 공사를 진행했으나 도카이도 본선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개선책이 필요했다. 국철 총재였던 소고 신지(十河信二)는 기사장으로 임명된 시마 히데오(島秀雄)와 협력하여 국제표준궤를 채용한 고속전차 신칸센(新幹線)의 건설을 결정했고 완성에 노력하였다. 고속경제성장은 대도시로 인구 유입을 재촉하였고 도쿄 지역과 오사카 지역에서는 통근객이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통근열차의 혼잡 완화를 위해 국철에서는 5개의 노선을 복복선화하는「통근오방면작전(通勤五方面作戦)[각주:114]」을 결정했고 건설에 착수한다. 또한 간토 지방의 사철 각 회사와 국철은 통근열차를 직접 지하철과 연결시키는 「상호직통운전(相互直通運転)」을 개시하였다. 반면에 간사이 지방에서는 상호 직통운전은 적었고 대신에 수송량 증가에 대응하여 터미널역의 대규모 확충이 이루어졌다.

 

 

< 고베(神戸), 다카라즈카(宝塚), 교토(京都) 각 선의 홈이 늘어서있는 한큐 우메다역(阪急梅田駅). >

 

3.4.1 신칸센의 완성

1960년대에 들어서고 도카이도 본선의 수송량은 한계에 달했다. 도쿄역에서 서쪽을 향해 매일 60대 이상의 우동열차가 달리고, 그 사이를 다수의 화물열차와 로컬선 열차가 채웠다. 이런 상황 해결의 수단으로서 신규 국제표준궤에 의한 별선을 건설하고 고속열차를 달리게 하는 「신간선(신칸센, 新幹線)」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은 1959년 3월에 국회에서 승인되었으나 세계의 철도가 경험하지 못한 「시속200km을 뛰어넘는 정기열차」라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 후인 1964년에 완성시킨다는 단기간의 계획이였다. 이를 위해 실제 노선의 일부를 조기에 완성시켰고 거기에 시제차량을 실제로 주행시켜서 차량과 시설의 확인시험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를 기반으로 실전용 차량과 시설의 구상을 굳혀가는 방식으로 하였다. 이 시험선은 가나가와현 서부에 시험선을 건설하였고 일반에 공개하였다. 당시 시속 200km으로 달리는 새로운 철도에 「꿈의 초특급(夢の超特急)」이라는 캐치프라이즈가 붙여지고, 소고 신지 총재와 시마 히데오 기사장의 지도, 국철 직원의 노력의 결과로 1964년[각주:115]10월 1일에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이 개업한다. 당초에 개업시에는 도쿄 - 오사카 간 4시간이 걸렸으나 다음 해 노반이 안정되고 3시간 10분으로 단축되었다. 신칸센의 개업에 의해 재래선(도카이도선)의 장거리 열차의 수요는 사라졌고, 화물열차와 로컬열차가 달리는 노선이 되었다.[각주: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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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키산(伊吹山)의 산기슭을 달리는 도카이도 신칸센 300계 전동차. >

 

3.4.2 통근수송의 강화

경제 발전에 의해 대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계속되어 통근 승객이 증가했다. 1960년에는 도쿄 지역의 통근열차에서 승차율이 300%을 넘는(소부선 312% 등) 노선이 있었다. 이 혼잡해소를 위해 국철은 「통근오방면작전(通勤五方面作戦)」을 실시한다. 즉, 혼잡이 심한 다섯 노선(위의 각주 참고)을 복복선화하는 계획이였다. 지가 폭등이 계속된 도심부의 증선공사에는 어마어마한 공사비를 써서 완성시켰다. 도쿄 지역의 사철과 국철은 영단지하철(약칭 에이단, 営団地下鉄)과 도영지하철(약칭 도에이, 都営地下鉄)과 제휴해서 지하철 노선에 교외에서 통근열차가 그대로 직통운전하는 「상호직통승차방식」을 채택하여 승객의 편의성 향상과 터미널역의 혼잡 완화 대책으로 하였다. 상호직통운전은 1960년에 게이세이전철이 도영지하철과 직통한 것을 최초로, 1962년 도부철도가 지하철 히비야선(日比谷線)과의 직통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상호직통운전」은 오사카에선 한큐전철의 사카이스지선(堺筋線) 직통 이외엔 진전이 없었다. 대신 승객의 증가 대책으로 한큐전철의 우메다역[각주:117](梅田駅)(1973년 완성, 9선 10면), 난카이전철의 난바역(難波駅)(1980년 완성, 8선 9면) 등 대규모 터미널이 만들어졌다. 또한 게이한전기철도와 긴키닛폰철도는 시내 중심부로 노선을 연장하여 지하철과 환승의 편의를 도모했다.

 

 

< 자동개찰기를 다른 회사보다 먼저 전면 도입한 한큐 우메다역. >

 

전후 지하철은 도쿄와 오사카에만 존재했으나 1957년 나고야를 시작으로 삿포로(1971년), 요코하마(1972년), 고베(1977년), 교토(1981년), 후쿠오카(1981년), 센다이(1987년) 등의 대도시에도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지하철보다 수송량이 적은 노선에 대해서는 새로운 도시교통수단으로 1964년에 하마마츠초역(浜松町駅)과 하네다 공항(羽田空港)간의 도쿄 모노레일(東京モノレール)이 개통되었다.

 

3.5 다른 교통수단과의 경쟁 심화

철도의 여객과 화물의 수송량은 늘어나고 있었으나 1960년대 후반이 되자 교통수단 전체에서 철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명확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60년의 국철의 여객 수송량 지분은 51%을 차지했지만, 1980년에 그 지분은 24.7%으로 저하되고 말았다(아래 표 참고). 지상에서는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업한 1964년에 일본 첫 고속도로였던 메이신고속도로(名神高速道路)[각주:118]가 완성되었고 민간 공항에서는 국내선 첫 제트여객기인 보잉 727이 날기 시작했다. 국철은 수송량 증대와 다른 교통기관과의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간선을 복선 전철화하는 「무연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간선열차의 속도 증가를 꾀하였다. 이 성과를 도입한 1968년 가을의 시각표 개정은 4-3-10[각주:119]으로 불리는, 특급과 급행을 대량으로 뽑아 우등열차에 의한 도시간 교통망을 형성하였다. 1970년에 오사카에서 열린 엑스포(통칭 만박)는 관광객이 일본 전국에서 방문했고, 그때까지 단체여행밖에 경험하지 못한 서민들이 개인여행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각 철도회사는 개인 승객 유치를 위한 캠페인(국철의『遠くへ行きたい』, 긴테츠의『真珠の小箱』 등)을 시작했다.

또한 무연화가 진행되어 증기기관차가 감소하는 것에 대해 SL붐[각주:120]이 과열되어 철도 동호인의 도덕적 해이가 지적되는 일이 생긴다[각주:121].

 

여객수송량(데이터는 『日本国有鉄道監査報告書』에서)

 

 

억명/km

1960년

1970년

1980년

국철

1240 1897 1931

사철

604 991 1214

버스

440 1029 1104

자동차

115 1813 3213

항공기

7 94 297

선박

26 48 61

대도시에서는 자동차가 늘어나서 도로 혼잡이 심해진 결과, 노면전차의 궤도가 교통 흐름의 장애로 간주되고 말았다. 도쿄에서는 1964년부터 노면전차 노선이 점차 폐지되고 현재 아라카와선(荒川線)만 운행하고 있다. 오사카에서 1969년 처음으로 노면전차를 모두 폐지했고 나고야나 교토 등 다른 대도시에도 점점 폐지된다. 한편 삿포로, 히로시마, 고치, 구마모토 등 지방중핵도시에서는 현재도 시민의 발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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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덴 아라카와선 >

 

1970년대 후반이 되자 주요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트럭 수송이 늘어나 화물운송에서의 철도의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국철 화물운송은 기존의 「출발역에서 화물을 싣는다」→「출발역 근처의 화물 야드에서 방향별 화물열차를 편성한다」 같은 방식으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급한 화물은 기피되었다. 1965년 11월 26일부터 9일간 계속된 「파업권 파업」은 기간 중에 화물의 체류도 있었기에 화물의 국철 기피가 이어진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트럭에 대항하지 못한 탓에 국철은 야드 방식을 그만두고 출발역과 도착역을 고정하는 직통열차방식으로 바꾸게 된다.

야간열차는, 좌석차에 비해 비용적으로 싼 야간버스의 진출에 의해 크게 줄어들었고, 침대차도 국내 항공 운임의 상대적 저하에 의해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물수송량(데이터는 『日本国有鉄道監査報告書』에서)

 

억톤/km

1960년

1970년

1980년

국철

536 624 370

사철

9 10 7

트럭

208 1359 1789

항공기

- - 3

선박

616 1512 2222

3.6 국철의 경영파탄과 분할민영화

전후, 국내 수송체제의 근간이며 공공기업체라는 위치에 자리매김한 국철은, 국가재정과는 별도로 운영하는 독립채산체임에도 불구하고 운임개정과 설비 투자에 대해 국회 심의를 받아야 하는 반쪽짜리 존재였다.

이 체제는 전후 부흥기엔 무리 없이 굴러갔다. 즉 부흥을 위해 설비 투자의 필요성과 그 차례는 명확했었고 낮게 유지된 운임도 늘어나는 수요에 의해 충분이 충당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후 부흥이 종료가 된 시점부터 국철의 재정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우선,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된 1964년에 그때까지 계속 흑자였던 국철의 수지가 1년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그 후에도 적자는 이어지고 1967년에는 그때까지 축적한 흑자를 거덜내 이월 적자로 전락했다. 국철은 재정 재건을 목표로 1969년에 제 1차 재건계획을 수립했으나 적자의 확대는 멈추지 않았고 1971년에는 통상 기업활동에 필요한 지출만으로 수입금액을 초과한 「빚 변제 불가 사태(상각전적자)」에 빠지게 된다.

1971년부터 1972년에 걸쳐 국철 현장에서는 적자 개선을 위해 생산성개선운동이 실행되었다. 이것은 경영위기에 빠진 민간기업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개선운동이였으나 경영측의 운영 미숙으로 언론에 「부당노동행위」로 지적당했고 생산성 개선 효과를 낳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 문제는 그 후에도 노사간의 큰 응어리로 남았다. 그 후 여러가지 대책이 검토되었지만 해결책으론 걸맞지 않았고, 국철의 적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게 된다. 1980년 경부터 근본적 대책으로 국철 분할 민영화 안이 검토되고, 1987년에 국철은 분할되어 민영화된다.

 

3.6.1 신칸센의 연장과 적자의 확대

도카이도 신칸센은 순조롭게 승객이 늘어갔고, 그 연장선이던 산요 신칸센(山陽新幹線)[각주:122]의 건설이 이루어져 1972년에 오카야마(岡山) 개업, 1975년에 하카타(博多)까지 개업하였다. 1973년에 수립된 제 2차 재건계획은 당시 다나카 내각(田中内閣)의 일본열도개조론(日本列島改造論)[각주:123]에 영향을 받아 명목상으로는 방대한 규모의 투자를 받는 내용이였다.

즉, 수송력이 한계에 달한 도호쿠 본선의 대책으로 도호쿠 신칸센(東北新幹線)[각주:124]을 건설하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역구로 향하는 조에츠 신칸센(上越新幹線)[각주:125]과 나리타 신칸센(成田新幹線)[각주:126]을 동시에 건설하는 계획이였다. 이들 신칸센은(도중에 건설이 중지되는 나리타 신칸센은 제외) 건설 중에 폭등하는 물가의 영향을 받아 건설비가 대폭 올라서 1982년에 오미야역(大宮駅) 발착으로 잠정 개업했다.

당시의 국철 차입금은 상기의 오방면작전의 설비 투자도 더해져서 16조엔으로 올랐고, 이 금액은 연간 운수수입 2.7조엔의 6년분에 해당했다. 이들 투자에 즈음하여 국철은 국내 수송의 근간을 짊어진 설비 투자로서 정부로부터 출자를 요구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재정 투,융자에 의한 대부(빚)만이 인정될 뿐이였다. 또 수입확보를 위해 운임 개정(가격 상승)도 정치적 판단에 의해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다[각주:127].

 

3.6.2 국철 재건을 위한 대처

국철의 경영 상황은 일반 기업이였다면 상각전적자가 상태에 빠진 1971년에 이미 도산됐을만 한 상황이였다. 그러나 정부와 국철 당국은 국내 교통의 기반인 국철을 억압하려 하진 않았고 여러가지 구제책을 실시하였다.

1960년대부터 골칫거리였던 적자 로컬선에 대해서는 1980년에 제정한 일본국유철도경영재건촉진특별조치법(국철재건법)에 기반을 둔 특정지방교통선[각주:128]으로 83개 노선 3157.2km을 지정, 1990년까지 폐지 및 제3섹터 철도로 전환을 실시했다. 한편 1976년과 1981년에는 약 5조 엔에 달하는 채무 보류를 실시했다. 1976년 평균 50%의 운임 인상 후에도 빈번하게 인상하여 수입 증대를 도모했으나 승객 이탈이 늘어나고 적자가 커져갔다.

당시 국철은 국철노동조합(国鉄労働組合)[각주:129]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国鉄動力車労働組合)[각주:130] 등 노조가 승객의 불편을 고려하지 않고 「파업권 파업」과 「준법투쟁[각주:131]」과 같은 정치적 활동을 반복하였다. 준법투쟁은 승객의 반발을 샀고 1973년 3월 13일에는 승객의 분노를 폭발시켜 폭동이 된 아게오 사건(上尾事件)이 일어나는 등 국철 대한 추가적 자금 투입과 운임 인상은 허가되지 않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1981년부터 개시된 제 2차 임시행정조사회의 활동에서 국철 재건은 중요 항목이 되었다. 근본적인 대책으로 철도경영의 자주 독립을 확립하고 정치가의 영향을 배제하는 민영화책이 떠올랐다.

1983년에 나온 의견에는 국철민영화가 구가되었고 그 해 「국철재건관리위원회」가 설립, 분할민영화를 위해 검토가 진행되고 1985년에 10만 명의 인원 합리화 등을 포함한 최종 답신이 나왔다. 이 사이 국철 당국도 자조노력에 의해 대폭적인 합리화를 실시해 인원 삭감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조합 문제도 직장이 없어진다는 위기감 때문에 경영 측과 동노(動労)측의 관계는 점점 개선되어 갔다. 한편 반대위치에 있던 국노(国労)는 조합원이 이탈해 소수파로 전락한다.

그렇게 1987년 분할민영화가 실시된다.

 

4. 국철의 분할・민영화

국철 경영 파탄의 대책으로 1986년 11월 28일에 국철개혁관련8법안이 성립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1987년 4월 1일에 국철은 분할민영화가 되었다.

 

4.1 회사조직에 대해서

분할민영화는 국철의 운수부문을 각 지방을 담당하는 여객회사 6사와 화물만 취급하는 1사로 나누고, 연구부문을 철도총합기술연구소(鉄道総合技術研究所) 등으로 나누어 각각 회사 환경에 알맞게 경영을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거기에 신칸센의 시설 및 차량은 신칸센철도보유기구(新幹線鉄道保有機構)가 이어받았고 신칸센 열차가 달리고 있는 여객 3사(JR히가시니혼, JR도카이, JR니시니혼)는 신칸센보유기구에 대여료를 지불하고 쓰게 되었다. 또한, 「적자로컬선」은 제 3섹터형 회사로 분리된다. 이들 시책에 의해 각사의 업무내용에 맞춘 인원수를 정해서 국철 시기 26.8만명에 달하던 인원을 민영화 이후에는 20.6만명으로 줄이게 되었다.

 

4.2 장기 채무의 처리

국철 동언 당시,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채무가 37.1조 엔이 남아있었다. 이 중에 국철청산사업단(国鉄清算事業団)이 25.5조 엔을 물려받았고 남은 11.6조 엔을 동일본여객철도(東日本旅客鉄道), 동해여객철도(東海旅客鉄道), 서일본여객철도(西日本旅客鉄道), 일본화물철도(日本貨物鉄道), 신칸센보유기구가 부담하게 되었다. 국철청산사업단은 필요없게 된 광대한 화물 야드 등 구 국철재산 중에서 JR에 이관되지 않은 자산의 매각 등으로 부채를 줄일 예정이였다. 그러나 당시 거품경기시대로 지가의 급상승이 심해서 「넓은 토지의 매각은 버블을 부추긴다」며 매각을 동결하게 되어 채무 삭감은 생각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그 후 1998년에 국철청산사업단이 해산한 뒤 채무는 일단 철도건설공단(鉄道建設公団)으로 이관되었고, 2003년에 채무 23.2조 엔은 철도건설운수시설정비지원기구(鉄道建設・運輸施設整備支援機構)에 이어진다. 이 장기채무의 변제에는 지금까지도 세금으로 충당되고 있다.

 

구 국철에 관한 일반회계승계채무의 실질적 상환 진척 상황

 

年度

(1)승계채무잔액계

(2)승계채무
환국채잔액

(3)잔액총합
(1)+(2)

실질적
채무상환율(%)
((1)-(3)/25조엔)

구일본국유철도

차입금

구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차입금

구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채권

250,308

쇼와 62년3월31일

승계
50,599

헤이세이3년3월29일승계
9,372

헤이세이10년

10월22일승계
67,588

헤이세이10년

3월31일승계
30,035

헤이세이10년

10월22일승계
92,714

1990 50,599 9,078 59,677 59,677
1991 49,461 8,472 57,933 57,933
1992 48,863 8,167 57,030 57,030
1993 48,863 8,167 57,030 57,030
1994 48,863 8,167 57,030 57,030
1995 48,863 8,167 57,030 57,030
1996 47,275 7,560 54,835 54,835
1997 45,577 6,954 30,035 82,566 82,566
1998 43,574 6,256 35,231 30,035 30,632 145,728 94,369 240,097 4.1
1999 41,180 5,438 8,400 30,035 28,527 113,580 133,621 247,201 1.2
2000 38,370 4,498 30,035 25,068 97,971 137,351 235,322 6.0
2001 35,191 3,467 30,035 24,065 92,758 141,307 234,065 6.5
2002 31,858 2,436 30,035 22,057 86,386 145,148 231,534 7.5
2003 28,549 1,496 19,133 20,053 69,231 159,447 228,678 8.6
2004 25,327 677 7,917 16,046 49,967 172,961 222,928 10.9
2005 22,199 163 1,172 11,044 34,578 183,915 218,493 12.7
2006 19,093 86 5,028 24,207 189,835 214,042 14.5
단위는 억엔, 2006년은 예정액.

한편, 이용객이 적어 적자가 예상되는 JR홋카이도, JR시코쿠, JR규슈에는 JR 발족시부터 일본국유철도개혁법에 의해 자금 보전이 정해졌다. 즉 민영화시 37.1조 엔의 채무 중에 경영안전기금 1.3조 엔을 설정하여 이 기금의 운용액을 상기 여객 3사의 적자 보전에 쓰였다.

 

JR 각사의 경영 상황

혼슈의 여객 3사(JR히가시니혼, JR도카이, JR니시니혼)는 처음부터 흑자경영을 이어갔다. 이 3사는 모두 신칸센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시설 사용료를 부담해야 해서 주식 상장에 지장이 있었기에 신칸센의 매수를 위해 정부와 접촉했고, 1991년에 실현되었다. 이 때 신칸센보유기구가 가졌던 채무를 이어받는 동시에 국철청산사업단의 채무의 일부도 3사가 부담하는 등 시책이 이루어졌고 합계 15조 엔 이상이 3사의 부담이 된다 이 3사는 현재에도 안정된 흑자 경영을 이어가고 채무 변제를 하고 있다. 경영이 순조로운 혼슈의 3사는 통상 주식회사로 변경을 목표로 경영 노력을 계속했고 JR히가시니혼이 2002년 6월, JR니시니혼이 2004년 3월, JR도카이가 2006년 4월에 완전민영화로 바뀌었다. JR홋카이도, JR시코쿠, JR규슈의 3사는 경영안전기금의 운용액으로부터 보전을 받고 나서야 수지가 균형이 맞는 상황이 계속된다. JR카모츠는 발족 당시엔 거품경기의 영향을 받아 흑자가 이어졌으나 경기가 침체되기 시작한 1993년 이후 8년간 계속해서 경상적자에 빠진다. 그 후 경영 노력에 의해 경상흑자로 되돌아간다.

JR 각사의 경상손익 추이

 

억엔

홋카이도

히가시니혼

도카이

니시니혼

시코쿠

규슈

카모츠

1987년

-22 766 607 80 10 15 59

1990년

16 1496 1202 875 84 39 74

1994년

1 992 387 204 -5 -5 -82

1999년

15 1082 702 423 5 52 -37

2003년

15 1832 1175 650 3 62 19

※ 데이터는 참고 문헌『日本の鉄道史セミナー』에서 발췌

5. 현대의 철도

5.1 다른 교통수단과의 경쟁과 격전의 증가

국내 항공이 발달한 결과 도쿄, 오사카에서 홋카이도나 미나미큐슈로 가는 여객은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항공선 각 사의 할인정책이 다양해져서 도쿄~오사카 간과 오사카~후쿠호카 간에는 신칸센과 항공편의 요금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일본 전국에 고속도로가 깔린 뒤 여객은 철도와 고속버스 양자에 대해 도달시간과 요금을 비교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JR 각사는 주간특급열차의 속도를 올려 도달시간의 면에서 고속버스에 우위를 점한 반면에 야간열차는 다른 교통수단과의 경쟁력을 잃고 이용자가 줄어들어 크게 삭감되었다. 현재 야간열차는 카시오페아(カシオペア)[각주:132]나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トワイライトエクスプレス)[각주:133]와 같이 자금과 시간에 여유가 있는 여행자를 위한 열차가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1988년의 세토 대교(瀬戸大橋)와 세이칸 터널(青函トンネル)의 개통으로 철도연락선으로 바꿔 탈 필요 없이 시코쿠와 홋카이도를 직접 건너게 되어 철도의 편리성이 향상되었다. 그 중에 전자는 도착시간의 단축으로 여객 수요가 대폭적으로 증가했으나 후자는 여객 증가 없이 화물 운송에 공헌하였다. 자가용의 보급은 철도를 이용하는 통근객과 쇼핑객이 줄어드는 것을 불렀고 지방의 보통열차는 통학생이나 노인층이 승객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한편 도쿄 주변과 게이한신 지역 등 대도시권에서, 철도는 도착시각이 정확하고 도로의 정체에 좌우되지 않아 통근 및 통학에서 타 교통수단에 비해 압도적인 지분을 가진다. 이들 대도시에는 철도에 의한 수송력 강화가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오사카에서 1990년에 오사카시영지하철(大阪市営地下鉄) 나가호리츠루미료쿠치선(長堀鶴見緑地線)이 개통했고, 도쿄에도 다음 해 도영지하철(都営地下鉄) 오에도선(大江戸線)이 운행하기 시작한다. 도쿄의 지하철 노선 상호 직통은, 「지하철을 사이로 서로 다른 철도가 상대방까지 연결된다」가 일반화될 정도로 진행된다. 나고야와 교토의 지하철에서도 사철과 상호 연계를 보였다.

또한 지하철보단 수송력이 적은 공공교통수단으로 신교통 시스템의 증설이 이어졌다. 1981년에 고베의 포트라이너(ポートライナー)와 오사카의 뉴트램(ニュートラム)을 시작으로, 일본 각지에 건설되었다. 도쿄의 「유리카모메(ゆりかもめ)」는 오다이바(お台場) 등 인기 스팟을 경유하여 승차율이 높았으나 예상 승객을 맞추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고야 근교의 토우카다이신교통 토우카다이선(桃花台新交通桃花台線)은 1991년 개업했으나 이용객이 늘어나지 않았고, 2006년에 폐업하게 되었다.

 

5.2 기술혁신

이 시기 철도차량의 고속화와 보수 및 유지기능의 향상에서 기술적으로 중요한 개량이 이루어졌다. 차체경사차량(車体傾斜車両)[각주:134]의 기술혁신과 전기열차에 있어서 전자제어(가변전압가변주파수제어, 통칭 VVVF제어[각주:135])의 진전이다. 특히 후자는 JR, 사철을 막론하고 새 전동차와 전기기관차의 표준 시스템이 된다.

 

5.2.1 차체경사차량의 기술혁신

곡선구간을 고속으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차체경사차량(흔히 그 방식 중 하나인「진자식 열차(振り子式列車[각주:136])」라고 부름)이 있다. 국철의 차체경사차량은 1973년에 주오 본선에 등장한 381계 전동차가 있으나 그 이후 기술적인 진전이 없었다. 381계 전동차는 자연진자방식(自然振り子方式)으로 열차가 곡선에 들어서고 나서야 원심력으로 차체를 기우는 방식이였고, 이 기욺의 지연이 쾌적성을 해치고 있었다. 이 개선책으로 곡선에 접어드는 타이밍에 맞춰 기계로 차체를 기울게 하는 강제차체경사방식(強制車体傾斜方式)[각주:137]이 생긴다. 1989년에 JR시코쿠를 달리기 시작한 TSE[각주:138](증산차량은 2000계 기동차)는 자연진자방식과 강제차체경사방식을 짜맞추어 제어하는 자연진자기동차특급으로, 토산선(土讃線)과 요산선(予讃線)에서 큰 폭의 속도 상승을 달성했다. 계속해서 JR홋카이도의 키하 281계 기동차가 1994년부터 영업운전을 개시하여 도내 각 도시간의 도착시간 단축에 한 역할을 하였다. 전동차로서는 JR도카이의 383계 전동차 「와이드뷰-시나노(ワイドビューしなの)」가 제어진자+자기조타대차를 채용해 1995년부터 영업운전을 시행한다. 그 후 여객 각 회사 6사 모두 제어진자식 신형 특급을 등장시켰는데 차체경사차량으로 대처는 각 사의 사정에 의해 진척 정도가 달랐다. 예를 들어 JR도카이는 「시나노(しなの)」에 쓰이는 381계를 전부 383계로 바꿨지만 JR니시니혼은 신형진자전동차 283계 전동차를 개발하고 키세이 본선(紀勢本線)에 투입하고 나서 충분한 증비를 하지 않은 채 2010년에도 구식 381계 전차와 병용하고 있다.

 

5.2.2 전차제어의 전자화

전동차와 전기기관차는 탄생 이래 동력으로 「직류전동기」를 사용했고 제어에는 복수의 전동기와 많은 저항기를 변환시켜 전동기에 흐르는 전류를 제어하는 「저항제어(抵抗制御)」라는 방식을 이용했다. 직류전동기는 하중 변화나 회전력의 변화에 대해 허용 폭이 넓어서 전동차에 적합했으나 중요 부품 중 하나인 전기자(電機子)[각주:139]가 물리적으로 마모되어 정기적으로 청소 및 부품 교환 등 유지보수가 필요했던 것이 단점이였다. 또한 저항제어도 캠축에 의해 전기접점을 켜고 끄던 탓에 시간 경과에 따른 열화를 피할 수 없었기에 정기적 점검을 필요로 하던데다가 저항기에 의한 전력 손실이 불가피했다.

1968년에 영단지하철에서 시작된 6000계 전동차는 저항제어를 벗어나 전동기에 흐르는 전류를 반도체 소자로 접점 없이 전자적으로 제어하는 사이리스터쵸퍼방식[각주:140]을 채용해, 운행에 드는 비용과 유지보수성을 개선했다. 이 사이리스터쵸퍼는 크게 구분해 주전동기에 직권전동기를 사용하면서 전동기의 전기자에 흐르는 전류를 스위칭하는 전기자쵸퍼제어와, 복권전동기의 분권계자에 흐르는 전류를 스위칭하는 계자쵸퍼제어, 분권전동기의 전기자와 다른 여계자와 함께 고주파 스위칭을 하는 4상한쵸퍼제어의 세 종류가 존재했고, 앞의 2개가 선행 탑재되었다. 계자쵸퍼는 고속전동차의 회생 브레이크 기능의 추가에 적합해 도큐, 게이오, 긴테츠, 한큐 등 대형 사철 각 사가 1970년대 이후 대량으로 채용하였다. 전기자 쵸퍼는 중, 저속단계에서 고가감속을 반복하여 주회로에서 저항기를 없애야 하는 터널 내 온도 상승 억제와 에너지 절약에 큰 메리트가 되어 각 도시의 지하철에 1970년대 전반 이후 표준적으로 채용된다[각주:141]. 또한 이것들이 합쳐진 4상한쵸퍼제어는 영단지하철과 일부 신교통 시스템에 채용되었고 이후 VVVF제어로 이어진다. 

전차 구동 시스템의 본격적인 전자화는 전동기에 「카고형 삼상유도전동기(かご形三相誘導電動機)[각주:142]」를 사용해서 「가변전압가변주파수제어(可変電圧可変周波数制御)」(Variable Voltage Variable Frequency:VVVF[각주:143])방식으로 전동기를 움직일 수 있게 된 때이다. 이 전동기의 회전속도는 입력된 교류전류의 주파수에 비례했고 출력은 전압에 의해 제어되었다. 또한 전기자같이 마모되는 부품이 없어서 유지비를 대폭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VVVF방식은 대용량의 인버ㄴ터에 의해 적절한 주파수, 적절한 전압의 교류전기를 발생시켜 전동기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전력 손실이 적은데다가 물리적으로 전기접점을 대지 않아 정비가 적게 든다는 특징이 있다.

1982년 일본에서 구마모토시영전차(熊本市電) 8200형이 노면전차인 관계로 전기용량이 적고 궤도회로가 있지 않아 유도장애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본격적으로 전동차에 채용된 것은 1984년 긴테츠 1250계였고 이것은 세계 최초로 대형 전동차에서의 채용이였다. 1990년대 들어서 JR히가시니혼과 JR니시니혼에서 VVVF인버터제어에 의한 통근열차가 만들어지고 증산되었다. 신칸센에는 1990년대에 첫 차가 만들어지고 1992년부터 영업운전을 시작한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전동차와 전기기관차의 태반이 이 VVVF인버터제어를 이용하게 된다.

 

 

< 신칸센 300계 전동차 >

 

5.3 철도의 고속화

국철 재래선과 각 사철은 1970년경까지 달성한 최고속도 120km/h를 20년 이상 갱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교통수단과 경쟁에 맞서 승객을 확보하기 위해 각 철도회사는 쇼와 말기부터 재차 최고속도 갱신에 임하기 시작했다. 우선 1988년에 긴테츠가 신칸센에 뺏긴 승객을 되찾기 위해 나고야와 난바를 2시간만에 잇는 시각표를 설정했고, 「어반라이너(アーバンライナー)」21000계 전동차를 투입해 구간한정으로 최고속도 130km/h에 주행했다. 다음 해 JR히가시니혼의 651계 전동차 「슈퍼 히타치(スーパーひたち)」가 130km/h 운전을 개시한다. 이 열차는 일본 재래선에서 처음으로 100km/h를 상회하는 표정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JR규슈는 1992년에 뷔페 등 승객 서비스에 충실한 신형특급 787계 전동차를 「특급 츠바메(特急つばめ)」로 데뷔시키고 고속버스와 규슈 내 항공편에 맞섰다.

그 후 JR 각사에서 기술 개량으로 특급열차가 만들어졌고 130km/h 운전의 범위가 넓어졌다. 특급차량이 아니고도 JR니시니혼의 신쾌속(新快速)이 1995년 223계 1000번대로 투입되어 130km/h로 운전을 시작한다. 예외적으로 JR니시니혼의 681계 전동차가 신칸센에 준하는 규격으로 만들어진 호쿠호쿠선[각주:144] 내에서 160km/h[각주:145]로 운행을 하였다.

또한 신칸센에서는 1992년부터 300계 전동차를 이용하여 「노조미(のぞみ)」가 운행하기 시작하였고 최고속도의 상승 및 도달시간의 단축이 동시에 달성되었다. 그 후 등장한 500계 전동차는 더욱 빨라졌으나 너무 속도에 중시한 탓에 승차감이 불편하여 승객의 불평 아래 얼마 생산되지 않았고 그 후에는 속도와 승차감을 조절한 700계 전동차로 이어진다.

 

5.4 신선건설과 터널

JR로 바뀔 당시 신칸센 신규 건설이 일단 동결되었으나 그 후 수요에 응하여 연장 및 신설이 계획되고 실행된다. 그러나 국철시대와 달리 민영화된 JR에서는 개통 후 채산성에 대채 크게 추궁되었다. 예를 들어 야마가타 신칸센(山形新幹線)[각주:146]에선 비용이 높아 신선의 건설을 중지하고 재래선을 개량하여(신칸센으로는 늦어지지만) 재래선과 병용가능하게 했다. 나가노 신칸센(長野新幹線)(통칭)에서는 신칸센 개업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병행재래선 신에츠 본선의 경영을 제3섹터 시나노철도(しなの鉄道)에 이관하였다. 또한 재래선, 신칸센의 신역 건설에 대해 건설비의 일부 또는 전부가 그 지방의 부담으로 하는 청원역(請願駅)[각주:147]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들 신칸센의 건설과 츠쿠바 익스프레스[각주:148]같은 도시선 건설에 대한 특징으로는 「터널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최신 터널굴착기술 「신 오스트리안 터널 공법」에 의해 터널 공사에 걸리는 시간과 경비가 경감된 덕분이다. 즉 지가가 올라 토지를 사서 선로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 보다 터널을 파는 것이 더 싸진 탓에 터널구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출전 『トンネルものがたり』)

 

5.5 사고방지

철도는 자동차 등에 비해 사고율은 낮지만, 많은 승객을 태우고 운행하는 탓에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피해가 커진다. 또한 원인에 대해서도 사고수가 많은 건널목 사고, 1991년 시가라키고원철도열차충돌사고(信楽高原鐵道列車衝突事故)[각주:149], 2005년 JR후쿠치야마선탈선사고(JR福知山線脱線事故)[각주:150]와 같은 운전,운용하는 사람의 실수나 2004년 니가타현 주에츠지진(中越地震)으로 발생한 조에츠신칸센탈선사고(上越新幹線脱線事故)[각주:151], 돌풍때문에 벌어진 2005년 JR우에츠본선탈선사고(JR羽越本線脱線事故)[각주:152] 등 천차만별 다양하다. 철도회사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개선을 계속하고 있다.

 

5.5.1 건널목 사고 방지

건널목 사고 방지를 위해 건널목 자체를 없애 입체교차화하는 방법과 열차 접근시 건널목 내에 사람이나 차가 들어오면 열차를 멈추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근본적 대책이였으나 실행하기엔 자금이 많이 필요했다. 철도 건너편의 도로 혼잡 완화에도 효과가 있어서 철도회사 단독으로 공사하려는 경우는 적고, 지자체와 협력해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 오다큐 오다와라선(小田急小田原線)과 도부 이세사키선(東武鉄道伊勢崎線)에선 현재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후자는 건널목 내에 적외선 센서를 설치해 차단기가 내려간 뒤 건널목 내에 진입한 것이 있으면 접근하고 있는 열차에 정지신호를 보내는 방식이다.

충돌 시에 기관사 보호 대책으로 고상운전대화나 열차 전두부를 강화(철판 덧대기)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5.5.2 인위적 실수 방지

사람이 일으키는 실수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 실수를 내지 않게 훈련하는 것과, 사람이 사고로 이어질 것 같은 잘못된 운전을 한 상황에 기계가 알아서 무효화하는 「풀푸루프(フールプルーフ)[각주:153]」가 있다.

기존 운전훈련은 실제 차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형 사철과 JR에서는 실차에 가까운 감각으로 운전조작 훈련이 가능한 시뮬레이터를 개발했고 기관사의 양성이 에용되었다. 시뮬레이터는 실제로 경험하기 힘든 조건도 설정이 가능해서 교육훈련에 매우 효과가 있었다.

철도의 풀프루프에는 자동열차정지장치(ATS[각주:154])와 보다 고도화된 자동열차제어장치(ATC[각주:155])가 있다. ATC는 신칸센의 기본 기술 중 하나였으나 선로 조건과 외부의 조건에 맞추어 해당 열차의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설치와 유지에 고액의 비용이 든다. 일본에서는 신칸센 이외에 수송량이 큰 도시의 JR 각선과 대부분의 지하철, 대형 사철 등에서 채용되고 있다. ATS는 적신호에 브레이크를 거는 단순한 타입에서 ATC에 근접한 기능을 가진 타입까지 종류가 다양해 각 노선의 중요도에 따라 설치되고 있다. 2005년의 JR후쿠치야마선탈선사고에서 ATS 등급 불일치가 지적되었고 운행이 재개될 때 ATS의 개량이 실시되었다.

 

5.5.3 재해 대책

태풍같이 큰 규모의 기상재해에 대해서는, 기상정보의 발달로 사고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졌으나 협소한 범위에서 돌풍이나 회오리에 의한 사고는 수년에 1회정도 발생하고 있다. 철도회사는 강풍이 예상되는 곳에 방풍벽을 설치하고 선로 옆에 기상관측장치를 설치해 돌풍을 예상하는 등의 대책을 하고 있다.

대규모 지진에 대해서는 초기진동(P파)을 관지해 본진동(S파)가 오기 전에 열차를 멈추는 시스템이 개발된다. 1992년에 UrEDAS[각주:156]가 도카이도 신칸센에서 가동을 시작하고 순차적으로 점점 설치되었다. UrEDAS는 P파 검지 3초 후 경보를 울리는데 직하형 지진에서 P파와 S파가 거의 동시에 도달한 조에츠신칸센탈선사고같은 상황에는 효과가 적었다. 그 대책으로 P파 검지 1초 후에 경보를 울리는 컴펙트 UrEDAS가 개발되고 운용을 시작하고 있다.

 

6. 현재와 미래의 과제

(이 절에는 독자연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JR 발족 이후 JR 각사는 점차 독자경영방침을 보여주었고 버블경기로 인해 당초 서비스 향상이 도모되고 민영화의 성과가 나타났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버블 붕괴에 의해 대규모 구조조정과 함께 서비스는 간소화되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칸센 식당차의 폐지를 비롯한 공식 서비스 축소, 침대차 삭감, 로컬선 폐지 등 서비스 수준이 내려갔다는 목소리도 있다.

일본에서는 방대한 여객운수 수요가 있는 반면, 화물운수는 그 대부분이 트럭이 담당했다. 모달 시프트[각주:157]가 주장되는 한편 화물의 트럭-철도로의 시프트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JR후쿠치야마선탈선사고로 부각된 것처럼, 운용면의 사정과 효율을 과도하게 추구한 결과 합리화에 따른 인원 정리로 안전의식과 인재 육성이 현저하게 등한시된 것은 아닐까 하는 지적도 있다. 실제 졸업신입사원의 채용이 없던 시기가 있는 등 경영개선에 편중된 면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JR보다 미리 합리화를 하던 사철 각사에도 비슷한 문제였고 이익과 맞바꾸어 안전성을 희생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일본의 철도는 여전히 안전성과 시간 면에서 세계 최고 레벨이라고는 해도 그 신뢰성이 흔들리는 사태는 간과할 순 없다.

그러나 안전설비투자에는 큰 비용이 소모되므로 도시간 노선에 한해서는 JR과 대형 사철이 홈도어와 신형 ATS등 안전 설비도입을 추진하는 편이지만 수익성의 문제로 설비투자는 커녕 노후화된 설비 검사조차 의심스러운 로컬선(초시전기철도[각주:158] 등)도 있다.

또한, 국철 및 JR로부터 분리된 제3섹터형 지방노선의 문제와는 별도로 버블경제 과도기에 대도시에서 많이 계획되고 만들어진 제3섹터형 신도시교통의 적자문제도 심각하다. 낙관적인 수요 전망에 따라 건설되었지만 예상만큼 수요가 늘지 않아 아직도 수익성 전망이 밝지 않은 노선도 많고 통근 노선으로 건설되었지만 폐지된 신교통 시스템(토우카다이선)도 있다.

그러나 실패 사례도 있는 반면 유리카모메, 츠쿠바 익스프레스선과 같이 수익성 확보에 성공한 제3섹터의 노선도 있고, 계획과 수요만 충족된다면 결코 철도수송 자체가 쇠락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단 전국적으로 탈공공사업의 흐름, 그리고 근본적인 재정 악화의 영향으로 각 지역 계획선의 다수가 계획 철회, 혹은 변경이 검토되고 있다. 막대한 투자와 포화 상태에 이른 대도시 연선 사정을 반영한다면 그것도 불가피할 것이다.

또한 신칸선에 대해, JR측이 수익성에 난색을 표하는 부분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효과를 기대해 지방의 핌피 등 정치상의 사정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도 있으나(소위 아전인철「我田引鉄」) 철도 전반의 문제점과는 약간 방향이 다르다. 이는 신칸센 및 정비신칸센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일본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도와 함께 발전해왔다는 건 사실이다. 광역 교통으로 인해 철도 회사가 부동산 사업과 주택 개발을 하고(양질의 주택 공급에 성공한 경우도 있으나 철도 회사의 의도를 넘어서 무차별 개발로 이어진 사례도 적지 않다) 혹은 소매 및 유통업을 하여 소비 문화를 만들어 낸 것, 일간지와 같은 광역 미디어 발행을 가능하게 한 것 등 사회의 모습이 철도와 밀접하게 연결된 예는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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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4일 2시 11분 완료.

 

A4용지로 위키피디아 한번에 뽑으니까 30페이지 이상 나오더라...

 


 



  1. 수증기를 이용한 압력으로 피스톤을 움직여 동력을 얻는 방식. [본문으로]
  2. 영국의 증기기관차 발명가. 스티븐슨의 기관차로 시작된 영국의 철도는 이후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3. 마차철도. 19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다. 이후 기관차의 등장으로 인해 사라진다. [본문으로]
  4. 제정 러시아의 군인, 정치가. 1853년 에도 막부와 접촉하여 러일수호조약에 관여하였다. [본문으로]
  5. 흑선내항 사건의 페리 제독으로 알려진 인물. [본문으로]
  6. 이즈 국(현재의 시즈오카 현)의 에가와 가 당주 [본문으로]
  7. 에도 후기, 메이지 시대의 발명가. 동양의 에디슨이라고 불렸다. [본문으로]
  8. 국가에서 설립에 관여하고 경영함. [본문으로]
  9. 영국의 철도 기술자. 일본 철도의 궤간을 1.067mm의 협궤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고 침목을 나무로 선정하는 등 일본 철도 산업 육성에 기여하였다. 요코하마에 있는 사쿠라기쵸역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본문으로]
  10. 일본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 철도청 장관으로 철도 사업의 발전에 힘썼고, 철도 국유화를 주장하였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실제로는 몇 달 전부터 시나가와역 ~ 요코하마역은 임시로 영업을 하였음. [본문으로]
  12. 한신(阪神)이란 고베(神戸)와 오사카(大阪) 사이를 뜻한다. [본문으로]
  13. 한자음으로 경빈.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濱)의 한자를 한 글자씩 따서 게이힌이라고 불린다. [본문으로]
  14. 게이힌과 같이 京都(교토)·大阪(오사카)·神戸(고베)를 묶어서 부르는 말. [본문으로]
  15. 일본 최후의 내전. [본문으로]
  16. 메이지 시기 정치인. [본문으로]
  17. 이등박문. 메이지 시기 정치인. [본문으로]
  18. 후지타 재벌의 창립자. 현재의 DOWA 홀딩스. [본문으로]
  19. 현재의 난카이 전기철도가 된다. [본문으로]
  20. JR 제외 [본문으로]
  21. 에도시대의 길로 혼슈 중부 내륙쪽을 경유하는 노선이다. [본문으로]
  22. 도쿄에서 교토까지 약 495.5km에 이르는 에도시대의 도로이다. [본문으로]
  23. 3명 모두 다 나가사키 번 출신이다. [본문으로]
  24. 건설 중의 자금이자(8%)를 국가가 부담하고 개업 후의 수지수익의 8%를 국가가 보험해주고 국유지의 무지급 제공, 민유지 수매 후 불하, 용지의 지값 면제 등의 혜택을 주었다. [본문으로]
  25.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전시에 설치된 일본군 최고 통치 기관. [본문으로]
  26. 현재의 야마구치현, 히로시마현, 오카야마현 지역. 넓게는 고베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27. 혼슈 섬과 시코쿠, 큐슈 사이의 좁은 바다를 말한다. [본문으로]
  28. 구배란 기울기를 뜻한다. [본문으로]
  29. 곡선 반경이 크고, 구배가 낮고, 직선 선로일수록 열차의 평균 속력이 증가해 같은 시간동안 더 높은 수송력을 가지게 된다. [본문으로]
  30. 이후에 카고시마 본선, 미스미에선, 나가사키 본선, 사세보선, 오오무라선, 닛포 본선으로 나누어진다. [본문으로]
  31. 일부는 다른 회사의 노선을 매수 [본문으로]
  32. 1894~1895 [본문으로]
  33. 1904~1905 [본문으로]
  34. 요즘으로 말하자면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4번이나 환승했다는 이야기. [본문으로]
  35. 1912년 시영 노선 개설, 1918년 시영화 이후 1978년 9월 30일까지 운영하였다. [본문으로]
  36. 도시 간 전기 철도. [본문으로]
  37. 오차노미즈(御茶ノ水)-하치오지(八王子) 간을 운행하였다. 현재 JR주오선의 일부. [본문으로]
  38. 현재의 오우 본선. 후쿠시마역과 아오모리역을 잇는다. [본문으로]
  39. 각 차량의 사양이 다르고 서로 다른 회사에서 섞여 들어왔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0. 궤도의 간격이 표준보다 적은 철도. 건설비나 운행비가 적게 드는 장점이 있다. [본문으로]
  41. 도카이도선. [본문으로]
  42. 칸나미역(函南駅) - 아타미역(熱海駅) 간을 직선 관통하는 탄나터널 완성 전의 옛 노선. 현재의 고텐바선. [본문으로]
  43. 전후 완성된 축배치 2C2 타입의 기관차는 전부 다른 기종에서 왔음. [본문으로]
  44. 도쿄의 대형 사철 중 하나인 게이힌급행철도의 모태. 이 당시의 노선은 다이시선으로 운영하고 있다. [본문으로]
  45. 1949년 폐역. [본문으로]
  46. 차체를 수평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대차. 곡선 통과가 용이하고 고속 주행 시 안정감이 있다. [본문으로]
  47. 현재처럼 순환선으로 달리는 건 1925년의 일. [본문으로]
  48. 한큐전철의 전신. 현재는 타카라즈카선, 미노오선으로 운영하고 있다. [본문으로]
  49. 한큐토호그룹의 설립자. 철도를 기점으로 한 도시 개발과 유통 사업을 추진하여 사철 경영 모델의 원형을 만들어 냈다. [본문으로]
  50. 현재 케이세이전철의 전신. 도쿄와 나리타를 연결한다. [본문으로]
  51. 현재 긴키닛폰철도의 전신. [본문으로]
  52. 현재의 JR니시니혼 한와선. 1940년 난카이철도에 합병되었다. 합병 이전 일본에서 제일 빠른 열차로, 오사카-와카야마를 45분에 이어주는 초특급을 운영하였다. [본문으로]
  53. 현재의 한큐 교토 본선. 이 당시 텐진바시-케이한교토를 34분에 이어주는 초특급을 운영하였다. 표정속도 75.3km/h. [본문으로]
  54. 현재의 도쿄메트로의 전신. 1927년에 긴자선 아사쿠사역-우에노역 간을 개통한다. [본문으로]
  55. 1921년부터 1930년까지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한 지방에 있던 궤도. [본문으로]
  56. 군마현 타카사키시에서 니가타현 니가타시를 잇는 노선. 호쿠리쿠 신칸센 개통 후 우스이 급구배 구간은 폐선되었다. [본문으로]
  57. 퍼센트보다 작은 단위. 예를 들어 6.7퍼센트는 67퍼밀임. [본문으로]
  58. 야마가타 현에 있는 산맥. 오우 본선이 통과한다. [본문으로]
  59. 새로운 노선의 건설부터 하고 표준궤화는 나중에 하는 정책. [본문으로]
  60. 현재 철도의 표준궤 전환부터 하고 새로운 선로는 나중에 부설하는 정책. [본문으로]
  61. 아전인수를 철도의 상황으로 비꼰 것. [본문으로]
  62. 1908년~1911년과 1916년~1918년의 철도원 총재. [본문으로]
  63. 5월부터 3개월동안 마치다역~하시모토역 간 표준궤 실험을 하였음. [본문으로]
  64. 원래 도카이도 본선의 일부. 하코네 고개를 크게 우회하는 선형이라 개량 후 고텐바선으로 분리된다. [본문으로]
  65. 차량에 달린 후크들을 나사로 체결하는 방식. 사람이 직접 열차 사이에 들어가 연결한다. [본문으로]
  66. 열차를 운전할 때 선로에 적당한 구간을 만들어 한 구간에 한 개의 열차만 운전하도록 하는 방법. 열차끼리의 충돌, 추돌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다. [본문으로]
  67. 완목의 위치에 의해 열차의 운전조건을 지시하는 신호기. [본문으로]
  68. 현재의 요코하마역. 1915년에 요코하마역의 게이힌선 홈으로 흡수되었다. [본문으로]
  69. 1500V를 최초로 사용한 회사는 1918년의 오사카철도(大阪鉄道). [본문으로]
  70. 1115량 생산. 화물용 기관차의 결정판이라 불렸다. [본문으로]
  71. D51형을 설계한 사람은 시마 야스지로의 아들이자 이후에 신칸센 건설에 종사한 시마 히데오(島秀雄). [본문으로]
  72. 오오테시테츠로 불리는 16개 회사. [본문으로]
  73. 약칭 소테츠. 요코하마역을 터미널로 하고 있는 관동의 철도 회사. [본문으로]
  74. 전쟁을 위해 군사 목적으로 당시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한 강제적인 인수. 22개 사철이 국유화되었다. [본문으로]
  75. 다이도큐 시대 철도 노선은 현재 도큐를 포함해 게이오전철, 오다큐전철, 게이힌급행전철, 사가미철도를 합친 것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76. 간사이급행철도와 난카이철도가 합병해 긴키닛폰철도가 설립된다. 이 이전에도 각 사철간 합병이 있었음. [본문으로]
  77. 현재 JR니시니혼의 신쾌속은 교토와 오사카 사이를 34분만에 주파한다. 한큐의 특급과 약 10분 차이. [본문으로]
  78. 이후 도쿄메트로 긴자선. [본문으로]
  79. 이후 미도스지선. [본문으로]
  80. 참고로 서울의 노면전차는 1899년 5월 20일 개통. [본문으로]
  81. 이때 신칸센(新幹線)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고 전쟁 이후 도카이도 신선이라 불렸던 계획도 여기서 이름을 따와 도카이도 신칸센이라고 불리게 된다. [본문으로]
  82. 폭격에 의해 변전소가 파괴될 경우 사용할 수 없기에 육군이 비전화를 주장하였다. [본문으로]
  83. 이것은 전황의 악화가 특권계층(고위 장교와 재계인 등)에게도 점차 총력전 체재를 강요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84. 이노하나 터널 열차총격사건 등 [본문으로]
  85. 일본 제국의 국가원수인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86. 교외로 식료품을 사러 가기 위한 사람들을 실은 열차. [본문으로]
  87. 현재의 도쿄지하철. [본문으로]
  88. 이른바 다이도큐(大東急) [본문으로]
  89. 1940년에 난카이 철도와 통합된 탓에 이 때는 한와야마테선을 말한다. [본문으로]
  90. 현재 JR츠야마선(津山線) [본문으로]
  91. 뜻밖에도 종전 이전 국철에서 가장 긴 전철화 구간이였음. [본문으로]
  92. 제로센 등을 제조했던 미츠비시 등 군수공장이 있었음. [본문으로]
  93. 쇼와 11년도를 뜻함. [본문으로]
  94. 도쿄도 아라카와구 닛포리역에서 출발해 미야기현 이와누마시 이와누마역까지 있는 간선 노선. [본문으로]
  95. 혼슈의 아오모리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를 잇는 철도연락선. [본문으로]
  96. 히로시마전철(広島電鉄)에서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부터 살아남은 직원(여직원이 다수)에 의해 열차 운행이 재개되었다. [본문으로]
  97. 일본의 실효 지배가 미치지 않게 된 사할린 제외 [본문으로]
  98. 買い出し列車 [본문으로]
  99. 사망자 6명 [본문으로]
  100. 사망자 3명 [본문으로]
  101. 1950년 4월 11일 [본문으로]
  102. 그때까지의 특급열차는 정원제로, 좌석은 승차 시 계원에게 지정되었으나 츠바메와 하토는 좌석을 대장으로 관리하여 표 구입 시 역무원이 관리자에게 전화로 통화한 후 좌석을 지정하는 시스템으로 바뀐다. [본문으로]
  103. 일본공업규격 : nose suspension drive. 모터에서 축으로 전달하는 구동 방식의 일종. [본문으로]
  104. 토크 컨버터. 유체를 사용하여 토크를 변환하여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 [본문으로]
  105. 후의 키하 17형. [본문으로]
  106. 센다이역과 우젠치토세역을 잇는 노선. [본문으로]
  107. 당시 도쿄-오사카 7시간 반. [본문으로]
  108. 오릭스 브레이브스,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거쳐 현재의 오릭스 버팔로즈. [본문으로]
  109. 현재 도쿄 아쿠르트 스왈로즈. [본문으로]
  110. 2004년에 오릭스 버팔로즈에 흡수되었음. [본문으로]
  111. 현재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본문으로]
  112. 현재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본문으로]
  113. Multi Access seat Reservation System. [본문으로]
  114. 1964년 6월 도카이도 본선, 주오 본선, 도호쿠 본선, 조반선, 소부 본선의 수송력 증강을 위한 프로젝트. [본문으로]
  115. 1964년 도쿄 하계 올림픽 개최년도. [본문으로]
  116. 소고 신지와 시마 히데오는 신칸센 개업 전 건설비 폭등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여 개업 세레모니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본문으로]
  117. 자동개찰구를 전면적으로 채용하였다. 이는 다른 역들의 효시가 된다. [본문으로]
  118. 나고야와 오사카를 잇는 고속도로. [본문으로]
  119. 1968년 10월 1일 실시된 시각표 개정. 욘산토라고 불린다. 현재에 이르는 JR 열차군의 기초를 닦은 획기적인 내용이였다. [본문으로]
  120. Steam Locomotive. 1965년부터 약 10년간 증기기관차를 좇는 붐이다. [본문으로]
  121. 국철의 증기기관차는 1975년에 정기운행을 종료했다. [본문으로]
  122. 신오사카역에서 하카타역까지 잇는 JR 니시니혼의 신칸센 노선. 1972년 3월 15일 개업하였다. [본문으로]
  123. 공업 재배치 및 교통, 정보통신의 전국적 네트워크 형성으로 대도시에 집중된 인적 자원, 자본 등의 지방 분산을 추진하는 것. [본문으로]
  124. 도쿄역에서 신아오모리역을 잇는 JR 히가시니혼의 신칸센 노선. 1982년 6월 23일 개업하였다. [본문으로]
  125. 오미야역에서 니가타역까지 잇는 JR 히가시니혼의 신칸센 노선. 1982년 11월 15일 개업하였다. [본문으로]
  126. 도쿄역에서 치바현 나리타시의 나리타 국제공항까지 연결하려뎐 노선. 건설 반대운동이 격렬하고 용지 매수가 진행되지 않아 미성선이다. [본문으로]
  127. 예를 들어, 1972년 4월에 예정된 운임 상승이 실시된 것은 2년 반 뒤인 1974년 10월이였다. [본문으로]
  128. 국철재건법에 규정된 지방교통선 중 버스 전환이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수송밀도 일 4000명 이하의 국철 노선. [본문으로]
  129. 약칭 국노(고쿠로,国労) [본문으로]
  130. 약칭 동노(도로,動労) [본문으로]
  131. 형식적으로 법령, 규칙을 준수하나 과잉 해석을 통해 업무 능률을 정체시키는 것. [본문으로]
  132. 도쿄와 삿포로를 이어주는 침대특급. 홋카이도 신칸센의 발표와 함께 2016년 3월 폐지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133. 오사카와 삿포로를 이어주는 침대특급. 홋카이도 신칸센의 발표와 함께 2015년 3월 폐지되었다. [본문으로]
  134. 한국에서는 틸팅열차라고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135. Variable Voltage Variable Frequency. [본문으로]
  136. 후리코식 열차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37. 2차 스프링이 있는 공기스프링을 이용한다. 1960년대 자연진자방식과 더불어 연구되었으나 제어기술의 진보가 최근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방식은 JR홋카이도가 1997년에 201계 통근기동차에 처음으로 채용된 이후 JR과 사철의 특급차량의 고속화, 신칸센 차량의 고속화로 이용이 확대되고 있다. [본문으로]
  138. Trans Shikoku Experimental의 약칭. [본문으로]
  139. 전자(電磁)장치에서 고정 부분에 대하여 회전 혹은 이동운동에 의해서 전기-기계 에너지 변환 또는 회로의 개폐 등을 하는 부분 [본문으로]
  140. 직류전동기가 부착된 전기차량의 동력제어. [본문으로]
  141. 이 고가감속 운전 덕분에 한신의 「青胴車」로 불리는 각역정차용 전차에도 개조 및 신차에 투입된다. [본문으로]
  142. 삼상교류에서 회전자계를 생성하고 반도체의 양 끝을 잘라 카고형 구조의 카고형 회전자를 이용한 전동기. [본문으로]
  143. 유도전동기에 가해지는 전압과 주파수를 동시에 조절하여 교류전동기의 토크와 회전속도를 제어하는 기술. [본문으로]
  144. 2015년 3월 13일까지 JR니시니혼의 하쿠타카가 이 노선을 경유했다. [본문으로]
  145. 협궤 최고속도. [본문으로]
  146. 재래선을 표준궤로 개궤해 도호쿠 신칸센과 직통운행을 하고 있다. 후쿠시마역에서 분기된다. [본문으로]
  147. 주민들의 편의로 만들어지는 역. 한국의 [본문으로]
  148. TSUKUBA EXPRESS. 도쿄의 아키하바라역과 이바라키의 츠쿠바역을 잇는다. 조반신선(常磐新線)이라고도 불린다. [본문으로]
  149. JR니시니혼 임시쾌속열차와 정면충돌한 사고. JR니시니혼측 승객 30명, 시가라키고원철도 승객 및 승무원 12명 42명 사망 및 614명 중경상. [본문으로]
  150. JR니시니혼 아마가사키역 근처에서 일어난 탈선사고. 승객 및 승무원 107명 사망, 562명 부상. [본문으로]
  151. 주에츠 지진 발생 후 진앙 주변을 지나가던 신칸센 열차가 탈선한 사고. 신칸센 첫 탈선사고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152. 눈보라로 인해 열차가 탈선하여 선두차량에 탑승한 5명 사망, 32명 중경상. [본문으로]
  153. 제어계 시스템이나 제어 장치에 대하여 인간의 오동작을 방지하기 위한 설계. [본문으로]
  154. Automatic Train Stop. GO-STOP으로 통제하는 점제어식과 신호단계에 맞춰 최대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속도조사식으로 나눌 수 있다. [본문으로]
  155. Automatic Train Control. ATC방식은 열차의 존재 유무 뿐만아니라 열차속도 까지 통제의 판단요소에 포함시킨 철도보안장비. [본문으로]
  156. 조기지진감지경보시스템(Urgent Earthquake Detection and Alarm System) [본문으로]
  157. Modal shift. 운송수단을 보다 효율성이 높은 운송수단으로 변경하는 것. [본문으로]
  158. 銚子電気鉄道. 치바현 쵸시시에 있는 철도회사. 1928년 생산 차량을 2010년까지 사용한 전례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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